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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재벌가의 ‘효자·효녀 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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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13 21:23:03 수정 : 2017-11-13 21: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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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딘데 내가 와 있는 건가.”

지난 1일 오후 1시55분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피고인석에 자리 잡은 90대 노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변호인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노인은 재판 시작 5분을 남겨둔 상황임에도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기소된 뒤 열리는 41번째 재판이지만 매번 새롭기만 하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
경영비리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신격호(95)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얘기다. 지난날 한·일 양국을 분주히 오가는 ‘셔틀경영’으로 한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재계의 ‘거목’은 이젠 거동조차 할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법원을 오가는 처지가 됐다.

재판장의 마음도 가볍지 않아 보였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피고인을 두고 장시간 재판을 진행해야 해서다.

김상동 부장판사는 재판 도중 “화장실을 다녀오게 해 달라”는 신 총괄회장의 요청을 기꺼이 허락했다. 수행원들과 법정을 빠져나가는 신 총괄회장을 향해 “천천히 다녀오셔도 됩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귀가 어두운 신 총괄회장을 위한 배려였다.

김 부장판사는 재판이 잠시 중단된 상황에서도 수행원들에게 “오늘 간병인도 오셨나”, “평소 바깥 외출은 하시나”, “왼쪽 귀가 어두우신가, 오른쪽 귀가 어두우신가” 등 신 총괄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곤 했다.

재판장은 신 총괄회장이 법정으로 돌아오자 다시 엄중한 모습으로 심문을 재개했다. 그는 “장남 동주씨에게 월급 준 것 기억나십니까. 그게 잘못인 것 인정하십니까”라고 소리 높여 물었다.

신 총괄회장은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란히 앉은 변호인은 질문을 빈 종이에 옮겨적어 설명하는 등 이해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질문의 요지를 겨우 파악한 그는 한마디 던졌다. “그게 문제가 되느냐.”

재판장은 이어 “서미경(사실혼관계)씨와 딸 유미씨에게 월급 준 건 잘못된 것 아닌가” “딸 영자씨에게 부당이익 얻게 한 건 잘못 아닌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회사에서 일했으니 월급 주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지금 재판받고 있는 건 아시냐”는 재판장의 물음엔 “모르겠다. 뭘 재판하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검찰은 이날 신 총괄회장에게 징역 10년에 벌금 3000억원을 구형했다.

신 총괄회장은 이날 기억이 온전치 못한 부분이 있어도 최소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진 않는 모습이었다. 연이어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는 치매 노인의 발언도 솔직해 보였다. 신 총괄회장의 이날 모습과 태도는 여러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면피성 발언만 이어간 자녀들과 여러모로 대비됐다. 즉 동주·동빈 등 신 총괄회장의 자녀들은 불과 이틀 전 같은 법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한결같이 “나는 몰랐다” “아버지 지시를 차마 거스를 수 없었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면피성 발언만 이어갔다. 그야말로 모든 잘못을 아버지에게 떠넘긴 격이었다.

검찰이 아버지에게도 중형을 구형할 뜻을 분명히 했음에도 결국 이날 법정에선 95세 노인 한 사람만이 죄인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 밖으로 나서는 뒷맛이 씁쓸했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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