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있으면 귀신도 사귄다’고 했던가. 당찬 비판의 날은 무디어졌다. 미·중 기업인모임에서 중국의 불공정무역을 비판하던 말이 갑자기 바뀌었다. “중국을 비난하지 않겠다. 한 나라가 국민을 위해 다른 나라를 이용하는 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미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숫자놀음에 트럼프가 놀아났다.” 북핵·무역불균형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으니. 트럼프 대통령은 당했다. 누가 뭐래도 승자는 시진핑 국가주석이다.
그런 ‘싸움의 기술’은 어디에서 단련한 걸까. 답을 역사에서 찾아본다.
청 연경에 간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 연경은 지금의 베이징이다.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왜? 연경 거리를 누비는 상인들을 봤기 때문이다. 사행단으로 간 조선 선비들이 찾은 유리창. 그곳은 아직도 그 이름 그대로 천안문 서남쪽에 남아 있다. 유리창 거리의 포자(鋪子·가게)는 1000개를 웃돌았다. 없는 물건이 없었다. 한양 육의전? 시골거리의 가게처럼 느껴졌을까. 그들은 그곳에서 대청제국을 일으킨 ‘실용의 힘’을 본다. 공자 왈 맹자 왈을 외며 성리학 이념에 사로잡힌 조선. 개혁을 부르짖는 실학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지금의 중국은 한족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 흐름이 어디 가겠는가. “중국은 우리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은 역사성을 가진 말이다. 권모술수, 거래의 기술과도 통한다.
친미·친중 이념에 사로잡힌 우리의 정치. 청와대는 한·중 정상회담 직후 “사드는 봉인됐다”고 했다. “새 출발이며 좋은 시작”이라는 시 주석의 말이 크게 들린 걸까. 신화통신 보도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을 앞에 두고 “역사 앞에 책임을 지라”고 한 시 주석의 말을 앞세웠다. 권모술수와 거래기술 앞에서 이념은 빛 좋은 개살구 아닐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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