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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제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점, 여기가 역사거리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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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10 10:00:00 수정 : 2017-11-10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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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골목 투어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가 중심이었다. 경주와 상주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번갈아가며 설치됐다. 감영은 행정, 사법, 군사력을 모두 쥐고 있는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관청을 말한다. 지금의 도청을 생각하면 된다. 임진왜란 후 경상도 감영은 대구로 고정됐다. 대구는 육로뿐 아니라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수로 교통 이용이 용이한 사통팔달의 지역이었다. 감영이 설치된 후 대구엔 약령시(藥令市)가 열렸다.
대구에 가장 큰 서문시장은 야시장으로 유명하다.

약령시는 약재를 매매하는 시장을 말한다. 약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한 전통시장이 필요하자 효종 때 대구에 시장을 조성키로 했다. 300여개의 상설 점포가 있었고, 봄과 가을에 한 달씩 열리는 장이 서면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구를 찾았다고 한다. 대구로 돈이 몰리기 시작했고 대구는 정치·경제적으로 경상도의 중심이 됐다.

약령시는 일제강점기 때 타격을 받는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 자금과 연락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지목받아 탄압의 대상이 됐고, 1941년 장이 폐지되고 말았다. 해방 후 활기를 되찾던 약령시는 6·25전쟁으로 춘추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변모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현재 대구 중구 남성로와 동성로 등 번화가가 과거 약령시 자리다. 지금도 많은 약재상점이 있고 한약재 경매시장이 열리고 있다. 또 약재시장 근처가 대구에 가장 큰 시장인 서문시장이 있는데, 대구의 대표적인 먹방투어 코스다.
대구 약전골목 벽에 그린 옛 약령시 모습.

◆다양한 모습 품은 대구 근대골목

약령시는 지금은 약전골목으로 통한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반월당네거리 부근으로 대형 쇼핑센터와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근대 들어 대구 유지들이 모여 살았고 문화의 중심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진골목이다.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과 반월당역 사이에 있는 골목이다. 경상도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데 이 때문에 ‘긴 골목’이 ‘진 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대부분 건물은 식당, 숙소 등으로 변했지만, 옛 모습은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있다. 
1982년 문을 연 미도다방은 대구 근대다방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으로 정인숙씨가 운영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등이 자주 찾았다. 대구 정계 소식을 알려면 ‘미도다방’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진골목을 걷다 보면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2층집을 만난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건물이다. 정소아과의원 건너편엔 ‘미도다방’이 있다. 1982년 문을 연 미도다방은 서너 번 이사를 했지만 간판만은 그대로다. 대구 근대다방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이다. 다방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준규 전 국회의장 등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등이 자주 찾았다. 대구 정계 소식을 알려면 ‘미도다방’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진골목은 근대의 모습뿐 아니라 대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다.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아 국채를 갚자는 국권회복운동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제외됐는데, 진골목에 살던 부인 7명이 나서서 패물을 내놓았다. 이를 기폭제로 전국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제일예배당 1층에선 독립선언서를 탁본해 가져갈 수 있다.
대구 진골목의 조형물.

진골목을 나오면 대구 제일예배당과 계산성당을 만난다. 제일예배당은 대구의 기독교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건물이다. 2층이 예배당이고, 1층은 교회 역사가 전시돼 있다. 특히 독립선언서를 탁본해 가져갈 수 있도록 돼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일예배당이 운영하던 계성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등사한 뒤 배포한 것을 기념해 설치했다.
대구 청라언덕은 3·1운동길로도 불린다. 1000여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나라 대표 가곡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곳이다.
계산성당 맞은편 언덕을 오르는 길은 3·1운동길로 불린다. 1000여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이 언덕은 ‘청라언덕’으로도 부르는데, ‘청라’는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대표 가곡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곳이다. 청라언덕 인근 계성학교에 다닌 박태준은 신명여학교에 다니던 유인경이라는 여학생을 보게 된다. 첫눈에 반했지만 고백하지 못하고 짝사랑으로 그치고 만다. 이 얘기를 들은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쓰고, 박태준이 곡을 지은 것이 ‘동무생각’이다.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을 기리는 서원

1571년 일본에서 태어난 사야가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았다. 조선에 쳐들어온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귀화해 왜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칭했다. 보통 항왜는 전투에서 밀리다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야가는 조선을 동경해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했다고 한다. 투항한 사야가는 경주, 울산 등에서 왜군의 침공을 막아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일본 장수 사야가는 임금에게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에게 이름을 내렸다. 선조 임금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성을 내렸고,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으로 지어졌다. 사야가는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무기 제조기술을 전수했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활약을 했다. 그가 눈을 감은 곳이 대구 달성군 우록 마을로, 이곳에 녹동서원이 있다. 서원 옆엔 한일우호관도 조성돼 있는데 한쪽 다리를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을 한 고양이상 ‘마네키네코’가 인상 깊다.
김충선을 기리는 사당 녹동서원 앞의 고양이상 ‘마네키네코’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다. 서원 앞뜰에 4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둘레가 8m에 이른다. 옆으로 퍼진 다양한 형태의 나뭇가지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달성군의 또 다른 서원인 도동서원은 은행나무가 한창이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서원철폐령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다. 서원 앞뜰에 4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둘레가 8m에 이른다. 옆으로 퍼진 다양한 형태의 나뭇가지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구=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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