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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얼빠진 민족의 위험한 불장난과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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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23 21:08:29 수정 : 2017-10-23 2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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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서 불완전한 독립한 한민족
정치·문화적 반독립상태서 헤매
서구이념과 기술 모방은 했지만
독립적인 국가인격 이루지 못해
한국이 낳은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세 가지의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예술은 사기다”, “기술은 예술이다”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간의 질병이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당대의 동서철학과 미학을 섭렵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창의력으로 인류문화의 ‘미래적 자산’이 됐다.

그는 왜 ‘예술은 사기’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면 인간이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도 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대뇌의 힘에서 비롯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궁극적 사실은 알 수 없고, 이것은 존재의 비밀이기도 하다. 인간은 존재의 바다로부터 현상이라는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낚시꾼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사기’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정치에 적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정치적이지 않은 예술은 없기 때문에 거꾸로 정치 또한 예술이기 때문일까.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정치는 비전(vision)을 팔아먹는 예술이라고 누가 말했다. 비전은 말로써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와 민중주의의 말의 성찬을 들어보면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인 것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에서의 정체불명의 말들은 더욱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다. 분명히 혼란을 즐기고 노리는 세력도 있는 것 같다.

백남준이 예언했듯이 미디어기술은 이미 ‘예술’ 혹은 ‘내용’이 됐다. 미디어는 오늘날 영감과 사실과 지식의 원천이다. 미디어를 장악한 사람들이 사실과 지식과 정의(正義)를 정의한다. 언론권력은 지금 진화 중이고, 어떻게 변종을 이룰지 아무도 모른다. 매스미디어에 스마트폰이 가세하면서 개인매스미디어-방송국 시대를 열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폭주 속에 대중들은 ‘미디어의 최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의 탄핵을 전후로 매스컴의 날조와 유도와 최면은 극성을 부린 것 같다.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이념대립을 부채질한 것 같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편 가르기와 민주-민중-대중 사이의 혼란과 거짓과 위선이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기술이 한국인에게 선물(膳物)일까, 악물(惡物)일까.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오그번은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차이를 ‘문화지체(cultural lag)’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 이론이 한국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드물 것이다.

언론권력은 스마트폰의 가세로 점차 공룡이 돼 가는 것 같다. 입법·사법·행정 등 전통적인 삼권은 언론권력 앞에 기가 죽은 지 오래다. 오늘날 정치현실을 보면 언론-스마트폰은 기술폭력의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떤 고명한 삶도, 어떤 조용한 삶도 언론-스마트폰의 촉수와 그물망에 걸리면 영락없는 ‘잡힌 물고기’의 신세가 된다. 미디어의 폭력 앞에 개인은 무력한 존재가 됐다. 거짓과 위선과 폭력은 동반자 관계에 있는 것 같다. 거짓은 위선을, 위선은 폭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백남준은 왜 ‘영원에 대한 숭배를 질병’이라고 했을까. 프랑스혁명의 모토였던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理想)도 질병이 된 지 오래다. 이들을 빙자한 위선과 폭력만 난무하고 있다. 자유(자유자본주의)와 평등(공산사회주의)은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세계적 폭력과 파시즘의 자기모순을 연출했다. 오늘날도 강대국의 패권경쟁과 전쟁의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기독교의 박애라는 것도 교회의 상표가 된 지 오래다. 제3의 평화사상과 초종교·초국가적 사유가 없이는 인류평화는 불가능하다.

남한은 자본주의 윤리를 상실한 채 ‘돈(money)신(神)’만이 활개치고 있고, 북한은 계급투쟁을 위장한 ‘개인숭배(주체사상)’의 폭력사회를 연출하고 있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한 한민족은 도그마와 이념의 편 가르기와 체제경쟁으로 치열하게 ‘닭싸움’ 중이다. 보수우파지식인들은 자생철학을 확립하지 못한 채 위선과 사대주의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고, 좌파지식인들은 이념적 잣대로 현실을 재단하고 있다. 지식권력엘리트들은 좌우를 떠나서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주인은 없다.

일제식민지에서 분단으로 불완전한 독립을 한 한민족은 정치군사·문화적으로 반(半)독립 상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서구이념과 기술의 종속상태에서 모방은 했지만 독립적인 개인과 국가인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권력의 원천이 결국 ‘폭력’이라며 인간존재의 불편한 진실을 들춘 적이 있다. 인간의 문화는 거짓과 폭력을 시대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거나 미화하고 합리화한 결과물인지 모른다.

한국은 기술모방사회에서 정체된 것 같다. 인문학과 자연과학과 산업기술이 모두 모방과 창조의 경계선에 있는 것 같다. 4차 산업혁명을 떠들고 있지만 정작 구체적 대안은 없다. 인문학적 자유와 예술이 마치 기술학처럼 자리 잡고 말았으니 서구이론과 프레임의 실험장이거나 공장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 이에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가지고 세계적 보편성에 기여할 능력도 없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 혈안이 돼 있고, 남한은 핵발전소 건설의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신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여론의 힘에 떠밀려 재개된다고 한다. 원자력이라는 최첨단의 에너지기술을 가지고 불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평화를 추구한다고 평화를 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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