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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도 어려워"…알기 쉬운 '우리말 법령' 언제쯤

입력 : 2017-10-08 18:06:56 수정 : 2017-10-08 18: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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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처, 2006년부터 개정 사업/민법·형법 등 기본법 정비 ‘감감’/전문가 “국민 알권리 보장해야” ‘병원 주치의는 위 수술 당시 원고에 대하여 수술 후 3주간의 가료와….’ ‘미성년자의 지려천박 또는 사람의 심신장애를 이용하여….’

실제 판결문에서 발췌한 이들 구절에서 가료나 지려천박은 언뜻 봐서는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일본식 용어인 가료(加療)는 치료로, 어려운 한자어인 지려천박(智慮淺薄)은 지적 능력 부족으로 순화할 수 있다. 심신장애(心身障碍)도 정신 장애로 순화하면 된다. 한글날을 맞아 국민들의 알 권리 차원에서 법조문과 판결문의 올바른 우리말 사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여전히 어려운 판결문…법조문이 근본 원인

8일 ‘대한민국 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공개된 판결문들을 보면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용어와 표현뿐 아니라 어문 규범에 어긋나는 표현들이 눈에 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에 있어’ 같은 일본어 투 표현이나 번역 투의 이중 부정문이 대표적이다. 일례로 ‘~ 후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이중 부정문은 ‘~후에 ~할 수 있다’라는 긍정문으로 쉽게 쓸 수 있다.

여러 문장이 쉼표로 이어지면서 판결문의 한 문장이 A4 용지 한 장을 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모두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판결문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다.

이를 두고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판결문이 어려운 건 법조인들이 압축적인 의미의 법률 용어와 표현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며 “판결문 문장이 길고 복잡해 의뢰인들이 해석을 요청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판사들이 판결문을 쉽게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대법원은 1991년 ‘판결서 작성 방식의 개선을 위한 참고 사항’ 제정을 시작으로,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또 각급 법원 차원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이 2014년 새로 쓰는 형사판결서, 2015년 새로 쓰는 민사판결서 책자를 발간한 게 대표적이다.

판결문이 어려운 근본 원인은 결국 법조문에 있다. 판결문 용어와 표현 대부분은 법조문에 있는 것들이다.

이 같은 이유로 법제처는 2006년부터 어려운 한자어와 전문 용어 등을 우리말로 정비하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법률 895건과 시행령 등 하위 법령 3292건이 정비됐다.

다만 국민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본법의 정비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기본법으로 꼽히는 민법과 형법, 가사·민사·형사·행정소송법 가운데 가사·민사소송법만 개정됐고, 민법의 경우에는 2015년 10월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지난해 5월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나머지 법률은 법제처가 마련한 정비안을 토대로 법무부가 개정안을 논의 중이다.

◆처벌 공백·혼선 우려 vs 국민 알 권리 중요

이처럼 개선이 더딘 건 법 개정 논의 자체가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형법, 형사소송법 같은 법률은 용어 등의 변경으로 의미가 바뀌면 처벌 공백이나 혼선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있어 왔다”며 “의미 변화를 초래한다고 하면 가급적 조문을 존중하고 이견이 없는 부분만 순화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해왔다”고 전했다.

대법원 관계자도 “편취 범의(각각 속여 뺏음, 범죄 의사로 순화 가능) 같은 법률 분야의 전문 용어들은 대체할 수 있는 쉬운 말이 있다 해도 바꿔 쓰면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있어 현실적으로 바꿔 쓰기 어렵다”고 말했다. 판결문이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판결문은 당사자의 주장에 법률을 적용해 판단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당사자 주장을 인용한 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다 보면 이중 부정 등의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말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는다.

국립국어원 김형배 연구관은 “법이 법조인들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법조문을 알기 쉽게 쓰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법조인들이) 국민들과 소통하려 한다면 국민들의 보편적인 언어를 쓰는 게 맞지 않냐”고 반문하며 “일부는 그런 노력을 하고 있긴 한데 여전히 전문 영역이란 생각 때문인지 잘 안 바꾸려는 태도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법조문과 판결문은 일반 문장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법 통역 연구 전문가인 이지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통역학)도 “민법만 봐도 일본어나 한자어가 많아 법률 전문가가 아니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야 하고 법률 해석에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언어 사용부터 법률에 대한 접근성이 굉장히 낮아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거나 행사하는 데 장벽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박진호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입법·사법 법조인들이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선결 과제인데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면서도 “다만 법조인들이 대체로 보수적이다 보니 법조문을 알기 쉽게 바꾸는 작업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진 않은데, 법조문을 보다 알기 쉽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그런 여론이 형성되면 법무부나 국회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관심을 당부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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