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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 학과사무실마다 잡기장이란 것이 있었다. 두툼한 대학노트다. 각자의 단상을 적는 공간이자 서로 연락하는 도구였다. 오프라인형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고나 할까. 누군가 적은 글에 공감을 표시하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밥 사달라”는 후배 글을 보고선 선배들은 기꺼이 주머니를 털었다.

한번은 잡기장에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의 삶을 자조하는 글이 올려졌다.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데 대한 고민이었다. 거기에 댓글을 달았다가 요즘 말로 ‘댓글 테러’를 당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회색의 삶이 중용의 길 아니겠느냐?’라는 댓글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느껴야 할 대학생으로서 부끄러움을 알라는 식의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그때 알았다. 좌나 우, 어느 쪽으로든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걸.

한 세대가 훌쩍 지났어도 흑백논리의 현실은 여전한 듯싶다. 공(功)과 과(過)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것인데 좌나 우는 굳이 이를 나누려고만 한다. 중도라고 표방했다가는 양쪽에서 소신 없다고 비난받는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일도양단으로 나눠지는가. 나이가 들면서, 특히 부모가 되면서 진보의 머리에 보수의 몸이 되는 경향이 짙어진다. 진보 성향의 인사들 중에 자녀를 제국주의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귀족학교라는 특목고·자사고에 진학시킨 부모가 한둘이던가.

이념이 장식품처럼 소모되는 세상이다. ‘정치에서는 진보, 생활에서는 보수’라는 말까지 있다. 정치적 성향과 생활 속 모습의 불일치를 지적한다.

청와대가 진보 진영의 이념 공세에 휘말린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를 ‘생활보수’라는 말로 두둔하고 나섰다. 민정수석실 인사검증 결과 ‘굳이 표현한다면 생활보수 스타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생활에서도 좌파의 요구가 관철되어야 한다”(‘진보집권플랜’)며 좌파의 각성을 촉구했던 조국 민정수석의 과거 발언과 사뭇 다르다. 위기 모면용일까, 아니면 인식의 변화일까.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소신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말이다.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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