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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인도·아랍권 ‘회회 상인’들 급증… 국제교역의 장 열었다

입력 : 2017-08-26 17:00:00 수정 : 2017-08-27 16: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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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려를 찾은 외국의 상인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13∼14세기는 가장 힘겨운 시기 중 하나로 꼽힌다. 몽골군의 침공에 이어 원 제국의 고려 내정 간섭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주로 13세기 후반에 극심했으며, 14세기는 그와 조금 다른 시기였다는 것을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도 자주 간과했다. 원 제국과의 공존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몽골에 대한 고려의 시각은 물론이고 고려인들의 생활상 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진 시기였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모습은 고려의 정치와 법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충선왕을 비롯한 여러 혼혈 국왕들이 고려를 통치한 14세기는 고려의 전통과 원 제국의 영향이 여러 모습으로 ‘결합’된 시기이다. 고려의 종묘에 해당했던 태묘(太廟)는 고려 모습과 제국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시기 고려 정부의 개혁 노선은 원 제국 정부의 각종 개혁 기조를 참고했고, 지방 제도와 군사 제도는 원 제국적 요소들을 수용하여 혁신으로 이어졌다.

14세기 고려는 중국을 비롯해 서역의 ‘회회’ 상인들과의 교역이 크게 증가했던 시기다. 사진은 전통시대의 상거래 현장을 보여주는 ‘태평성시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양국인 간의 활발한 왕래와 교류였다. 정치인, 종교인, 학자들이 시기를 막론하고 고려와 원 제국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소통했던 것이다. 그런 상시적 교류가 정치적 간섭, 경제적 침탈의 형태만을 띨 순 없었다. 어떤 때는 논쟁을 유발하고 어떤 때는 공감을 도출했다. 사고(思考)의 교환, 지향의 공유 등 문화적 교감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양국인들의 이런 잦은 접촉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고려 안팎에서 활동하던 외국 상인들의 역할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해상 통행의 경우 반드시 선박이 필요했고, 선박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상(海商)들이었기 때문이다. 육로 교통의 경우에도 상단(商團)들은 효율적 동선, 안정적 동행을 보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유용했다.

결국 14세기 고려인과 원 제국인들의 지속적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한반도는 그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시기보다도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한반도를 방문한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중국 상인뿐 아니라 이른바 서역에서 온 ‘회회(回回)’ 상인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는데, 내륙 아시아인들, 서아시아 아랍 문화권에서 온 이들, 인도양으로부터 온 이들 등이 다양하게 확인된다.

고려인들의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고려가요 ‘쌍화점’에도 서역 상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사진은 쌍화점이 실려있는 ‘악장가사’(樂章歌詞).
장서각 제공
사실 ‘회회인’들이 고려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은 이미 고려가요 ‘쌍화점’ 등의 작품에서 확인되었다. 고려인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들던 우물이나 불교사찰 등의 장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던 ‘쌍화점’이 또 하나의 공간으로 굳이 ‘회회아비가 운영하는 가게’를 택했다는 사실은 당시 회회인 등 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 고려인들에게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닐 정도로 일반화된 풍경이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회회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고려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 시기 고려를 활발하게 드나들고 있었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제대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들의 방문이 그저 코 크고 눈 색깔이 다른 이들의 왕래일 뿐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고려인들에게 이색적인 구경거리였던 것도 결코 아니다. 그들의 방문은 그 자체로 당시 고려가 이른바 동·서 세계 간 교역에서 어떤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들의 왕래로 인해 고려인들이 겪었을 세계관과 가치 정서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회회인의 방문 목적은 가지각색이었다. 1270년대에는 동·서 세계 간 교역에 종사한 상인들이 주로 취급하던 인기 상품의 확보를 위해 움직였다. 예컨대 진주 등의 물자 조달을 통상적 조달처가 아닌 새로운 지역을 찾으면서 고려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1290년대에는 원 제국 정부로부터 무역자금을 투자 받아 서역에서 여러 이국적 물자를 사와야 했으나 실패한 후, 원 제국 정부의 채권추심으로부터 도망쳤던 회회 ‘오르타끄(Ortaq)’ 상인들이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1310년대 원 제국 정부에서는 ‘몽골 노비들을 인도, 이란 등지로 반출하는 노예 무역선이 한반도에도 더러 들르는 문제’가 격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 세 가지 유형은 방문자들이 회회인들 이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동·서 세계 간 교역에 깊숙이 개입돼 있던 이들이었고, 방문 목적이 사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무역상들이 취급하던 물자, 사업상의 어려움, 경영 동선 등이 모두 그들을 한반도로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업을 지속 또는 확장하는 데 도움을 얻거나, 사업 재기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고려를 활발히 찾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나 이란 등지로부터의 방문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이들의 방문이 파상적이거나 일회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90년대 후반에는 인도 반도 마아바르(Maabar·馬八兒)국의 전직 재상이 충선왕을 예방한 바 있는데, 마아바르국은 동·서 세계 간 교역의 핵심 상업 거점이자 진주의 산출지였다. 또 1330년대 초에는 원 제국의 여러 칸국(Khanate) 중 이란 지역에 세워졌던 ‘일칸국’의 수장 아부 사이드(Abu Said·不賽因)가 충혜왕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일칸국 역시 1320년대 들어 북경의 원 제국 중앙정부와 활발하게 거래하던 중동의 주요 교역 세력이었다.

인도 및 이슬람지역에서 온 방문객들이 여느 상인이 아니라 고위 유력 정치인들이었던 점도 눈길을 끌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고려 방문이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들과 중국 원 제국 정부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직후 이루어지거나 위축됐다가 회복된 즈음에 이뤄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 정부와의 관계가 나빠져 종래의 교역 규모와 이윤이 감소한 탓에 새로운 교역 상대방, 대안적 교역시장의 존재를 찾아나서야 할 필요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뤄진 접촉들이었기 때문이다. 국제 상업 세력들이 13세기 말~14세기 초, 새로운 파트너로서 한반도의 잠재력을 진단하고자 했던 것이 암시하는 바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당시 동·서 세계 간 교역에 한반도가 어떤 형태로든 깊이 연동되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3~14세기 외국 상인의 고려 방문은 그간 동북아시아의 작은 시장에 불과했던 한반도를 국제 교역의 장으로 끌어냈다. 중국과의 교류에만 익숙했던 고려인들에게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역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를 부여하는 동시에 고려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더욱 확장되는 계기도 제공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사료를 보면 원 제국에 대한 고려인들의 시각이 대몽항쟁기에 비해 현저히 바뀌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으며, 그들이 많은 사안에서 ‘제국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고려인들이 자국의 문화나 전통을 간과한 것은 결코 아니어서,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나마 혁신, 보전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기에 고려인들이 자연스럽게 행했던 ‘문화적 절충’이야말로 양국인들 사이의 상시적 교류에 힘입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고려인들의 의식적 변모는 결국 고려인들로 하여금 해외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광대한 해외 시장은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었으며, 다양한 외국상인들은 좋은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국왕들이 해외 무역정책을 적극 구사했는데, 충렬왕과 충숙왕이 외국상인 유치에 주력했다면 충선왕과 충혜왕은 수출품 제작에 골몰했다. 아울러 고려 민간인들 역시 육로로 중국을 방문해 모시와 인삼을 수출한 후, 견직물을 구입해 바닷길로 돌아오곤 하였는데, ‘노걸대(老乞大)’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모습은 고려 민간 상인들의 대중국·대서역 ‘러시(rush)’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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