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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의음식문화여행] 폭신함과 보드라움의 추억, 계란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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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22 21:30:50 수정 : 2017-08-22 23: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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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계란말이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하반신 장애인 조제가 자신을 구해준 쓰네오에게 아침을 대접한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면서도 조제는 싱크대 위에서 한 손으로 능숙하게 달걀을 깨뜨린다. 조형물처럼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 쓰네오가 한 손에 밥공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 나무젖가락을 쥐고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만면에 미소가 번져간다. 집 안에 틀어박혀 무궁한 독서와 사색으로 시간을 보내는 조제는 마작 알바를 하는 바람둥이 대학생 쓰네오보다 훨씬 삶에 대해 당당하다. 완벽하게 말린 계란말이는 삶에 대한 조제의 깊은 성숙과 오만할 만큼의 초연함을 상징한다.

훌륭한 계란말이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절묘한 불 조절이 필요하다. 적절한 기름 양 또한 고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프라이팬에 펼쳐놓은 달걀을 깔끔하게 둘둘 잘 말아 내는 일이다. 어떤 경우는 태울 수도 있다. 옆구리를 터뜨릴 수도 있다.

계란말이는 계란프라이와 함께 1970, 80년대 교복 세대 도시락 반찬의 최고봉이었다. 햄이 나오기 전 소시지나 계란말이는 도시락 반찬의 로망이었다. 1960, 70년대 유년을 보내야 했던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달걀은 가슴 밑바닥 사연이 담겨 있다. 마당에서 놀던 닭이 알을 두 개밖에 낳지 않은 날에 어머니는 결정해야 한다. 누구에게 달걀을 줄 것인가. 달걀은 어김없이 가장인 아버지와 장남의 밥그릇 속에 깊숙이 숨겨지곤 했다. 혹은 장남의 양은도시락에만 몰래 담겨지기도 했다. 가족 간에도 계급이 있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둘째, 셋째, 넷째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를 할 때 삶은 달걀은 칠성사이다와 함께 빠지지 않는 메뉴다. 어디 멀리 다녀올 일이 있어 기차라도 탈라치면 어머니는 꼭 삶은 달걀을 비닐봉지에 소금과 함께 챙겨주시곤 하는 것이다.

계란말이, 계란프라이에는 어떤 가난이 혹은 어떤 슬픔이, 사랑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어떤 용기와 응원이 담겨있다. 닭이 알을 품듯 그 안에는 우주가, 생명의 원형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계란말이가 소환하는 어린 시절의 그 맛은 세상에서 가장 폭신한 부드러운 맛이다. 장애인인 조제가 도리어 쓰네오를 위로해준 음식, 고교시절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빼앗겼던 도시락 반찬. 계란말이는 유년의 즐거움과 어머니의 정성이 타원형으로 둥글게 감겨있다.

전국적으로 달걀대란이 일고 있는 요즘이다. 밥상에 어김없이 놓이던 달걀이 없으니 어머니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어린애처럼 상처를 입는다. 생이 지나칠 만큼 가혹한 현장이라도 도시락 반찬에 계란말이 하나면 밥 한 그릇도 뚝딱이었다. 달걀은 웅크리고 있는 완벽한 생명체이고 내 유년을 키워주던 아픔이며, 상처이며, 위로이며, 인내기 때문이다. 이제 맘 놓고 달걀도 먹을 수 없게 됐다. 유년의 따뜻한 몽상이 더 그립기만 하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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