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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임산부 배려석’ 도입 5년… 지하철 ‘분홍색’ 갈등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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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21 20:07:34 수정 : 2017-08-27 19: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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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선 남혐·여혐 ‘전쟁’ 양상 /女, 배려석 앉은 男 사진 올려 비난/男, 중년 여성 등 ‘女전용석’ 맞받아
“제가 왜 자리에 앉기 위해 모르는 사람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하나요?”

임신 3개월의 직장인 이모(32)씨는 최근 지하철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씨는 지하철에 탔을 때 ‘임산부 배려석’만 비어있어 그 자리에 앉았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이씨에게 한 노년 남성이 다가와 “임산부 맞느냐? 임산부가 아니면 당장 일어나라”라고 물었다. 순간 당황한 이씨는 “임신 3개월입니다”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그 남성은 “임신 표시를 하고 다니던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물러났다. 이씨는 “대뜸 묻길래 대답은 했지만, 왜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면서 “자리가 여러 자리가 비어있으면 임산부 배려석은 되도록 앉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 임신 초기라 배가 그리 나오지도 않았기에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주변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차라리 임산부 배려석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임산부 배려석 존재 때문에 일반석은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임신 6개월의 김모(28)씨는 임신 초기 때 지하철을 이용한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상한단다. 일반석은 이미 만원이라 노약자석에 앉은 적이 있는데, 노년 여성이 다가와 “어디 젊은 여자가 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냐. 당장 일어나라”고 호통을 쳤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 임산부라는 사실도 말하지 못한채 다른 칸으로 이동했단다. 김씨는 “노약자석이 노인과 장애인, 임산부 등의 약자를 위해 만든 자리인데, 어느 순간부터 노인들만을 위한 자리가 됐다. 그렇다고 임산부 배려석 앞에 가서 양보해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래서 최대한 지하철 이용을 자제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은 2013년부터 도입됐다. 지하철 객차 한 칸 당 2좌석으로 총 좌석이 54개, 노약자석을 제외한 일반자석이 42개임을 감안하면 전체 좌석의 3.7%, 일반석의 4.8%인 셈이다. 그러나 5%도 채 되지 않는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 도입 때부터 현재까지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장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하느냐 여부다. 한쪽은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자리에 앉았다가 임산부가 탑승하면 자리를 양보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말 그대로 ‘배려석’인 만큼 강제성이 없고, 비워두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논리다. 다른 한쪽은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앉아있을 경우 임산부가 양보받기 힘들기 때문에 아예 비워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임신 초기의 임산부들은 육안으로는 임신 여부를 식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워야 한다는 얘기다.

양측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에 임산부 배려석은 지금까지도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아울러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여혐)’, ‘남성 혐오(남혐)’ 기조가 확산되면서 임산부 배려석이 여혐-남혐 갈등의 기폭제가 되는 모양새다. SNS 상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검색하면 여성들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남성들의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 많은 여성들이 ‘무개념이네’, ‘핑크색 가리려고 겁나게 애쓰네. 면상에 핑크색 스프레이 뿌려주고 싶네’ 등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댓글이 많이 달려있다. 남성뿐만 아니라 비임산부 여성들도 많이 앉지만, 그들의 공격대상은 오로지 남성뿐이다. 이를 두고 남성들도 ‘누가 봐도 임산부가 아닌 중년 여성, 할머니들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다. 임산부 배려석은 사실상 여성 전용석이다’라며 맞받아치며 ‘여혐’을 조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건복지부가 2016년 실시한 ‘임산부 배려 인식도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산부 중 배려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40.9%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힘들고 피곤해서’는 단 7.9%에 불과했다. 배려하지 못한 이유로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임산부인지 몰라서(49.4%)’였고, 그 뒤로 ‘방법을 몰라서(24.6%)’였다. 임산부임을 나타내기 위한 가방 고리나 동전 지갑이 있지만, 이를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고, 이를 이용하는 임산부도 적다. 일반 사람들이 임산부를 알아보고 배려할 수 있게 더욱 가시적인 표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부산-김해 경전철은 임산부 배려석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핑크 라이트’(양보 신호등)을 시범 설치했다. 비콘을 소지한 임산부가 임산부 배려석 가까이 가면 그 옆에 설치된 핑크라이트가 비콘의 신호를 감지해 깜빡이며 임산부가 있음을 알리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임산부들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나 시스템을 설치하기 이전에 임산부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게 먼저라고 입을 모은다. 임산부가 무조건 배려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구호를 외치기 이전에 임산부가 배려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사회 전반에 모성 친화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임산부가 좀 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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