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공동체 가꾸기의 어려움

관련이슈 기자가 만난 세상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8-21 21:30:27 수정 : 2017-08-21 22:50:1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사이좋게 나눴으니 한 컵씩 맛보세요.”

지난해 초여름, 퇴근 후 빌라 1층에 들어서니 공지사항을 전하는 화이트보드에 반가운 글귀가 쓰여 있었다. 빌라 한쪽의 앵두나무에서 딴 앵두를 가져가라는 내용이었다. 화이트보드 밑에는 손톱만 한 앵두가 담긴 종이컵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 집어 입에 넣자 새콤한 앵두알이 톡 터졌다. 시중에 파는 과일처럼 달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아지는 맛이었다. 이웃들의 훈훈함이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이희경 국제부 기자
지난해 봄 결혼을 한 뒤 지금의 빌라로 이사를 왔다. 열두 집이 사는 평범한 빌라다. 처음엔 이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불친절한 이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던 터였다. 층간소음 다툼 기사도 떠올랐다. 하지만 모두 기우였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빌라 사람들은 유달리 ‘끈끈함’이 있었다. 비슷한 또래가 많아 오랜 기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반상회에서 소주 몇 잔이 돌자 ‘O층 남자’는 ‘형님’이 됐고, 아내에게는 동갑 친구가 생겼다. 빌라 사람들은 자주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참석 못할 때도 많았지만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이런 곳으로 이사 온 것은 행운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웃과 잘 지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기쁨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안정감이었다. 현관문을 열어놓거나 빈집 앞에 택배가 배달될 때도 불안하지 않았다. 흔한 층간소음 다툼도 없고, 양해를 구해야 할 일도 웃으며 마무리됐다. ‘이웃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소통 부재’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 봄에는 몇 집이 모여 화단에 꽃을 심었다. 꽃 종류부터 색깔까지 같이 고민한 뒤 화단을 꾸미고, 옥상에서 고기를 구우며 자축까지 했다. 그런데 땀 흘리며 완성한 화단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망가졌다. 누군가 꽃을 죄다 파간 것이다. 지난해 반가웠던 앵두도 올해는 못 먹게 됐다. 앵두나무에서도 앵두가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없어진 꽃과 앵두가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빌라 앞을 자주 지나는 동네 사람의 짓일 것이란 생각에 화가 났다. 화단은 길가 쪽에 있어 꽃이 피면 동네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데, 자신만을 위해 가져간 마음도 괘씸했다. 그 뒤로는 산책하다 어느 집 화단에서 꽃을 발견할 때면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을 못 믿게 된 것이다.

문득 내가 갖고 있던 공동체의식도 ‘우리 동네’가 아닌 ‘우리 빌라’로 한정돼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 사람들은 똘똘 뭉쳤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늘 작은 전쟁을 치렀다. 주차장에 못 보던 차가 있으면 빼 달라 했고, 빌라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지 감시하기 위해 폐쇄회로(CC)TV를 달았다. 꽃이 없어지자 화단 쪽에도 CCTV를 달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릴 땐 ‘이웃’의 범위가 ‘동네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줄어버린 건가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동네 안에서 우리 빌라만 외딴섬처럼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봄에도 빌라 화단에 꽃을 심을 것이다. ‘꽃 도둑’을 막기 위해 ‘동네 사람 모두 함께 즐겨요’라는 팻말을 붙여야 할까, 아니면 ‘CCTV가 설치돼 있습니다’라고 붙여야 할까. CCTV가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내년에도 새콤한 앵두 맛을 보고 싶다.

이희경 국제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