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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한국 평단, 칭찬만 있고 비평은 실종 … 애정어린 비판 필요”

입력 : 2017-08-21 21:05:14 수정 : 2017-08-24 16: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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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문학예술상’ 받은 평론가 권성우 “수상 소식을 듣고 사실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습니다. 학교 때는 열정적으로 일을 하면 평가를 받는 느낌이었는데 문단에 나와서는 솔직히 정직하게 글을 쓰면 쓸수록 소외당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죠. 이런 구조라면 내가 상을 받을 일은 없겠구나, 그걸 운명으로 알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했죠. 비평집으로는 등단 30년 만에 처음 받는 상이라서 커다란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등단 30년 만에 비평집으로 첫 문학상을 받은 문학평론가 권성우. 그는 “나보다 훨씬 힘들고 고독한 환경에서 묵묵히 좋은 글을 쓰는 이 땅의 비평가와 문인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살아갈 것”이라고 ‘비평의 고독’ 서문에 썼다.
남정탁 기자

문학평론가 권성우(54·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가 지난해 펴낸 여섯 번째 비평집 ‘비평의 고독’(소명출판)으로 올 임화문학예술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광화문에서 만났다. 의미 있는 상 중 하나이기는 하되 그가 수상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따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5년 서울대 국문과 재학시절 ‘이문열론’으로 대학문학상을 받고, 이어 1987년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돼 또래에 비해 일찍 비평가로 등단한 권성우는 한국 문단에서 논쟁적인 평론가로 호가가 높다. ‘창비’와는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에 대해, ‘문학과지성’과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문학동네’와도 문학권력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한국 평단에서는 이례적으로 이른바 주요 문학 에콜을 상대로 모두 논쟁을 벌인 이력에서 드러나듯 그는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임화는 당대 가장 잘나가는 평론가요 시인이면서 카프(KAPF) 서기장까지 한 사람임에도 죽음과 같은 고독을 이야기하는 참 단순치 않은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죠. 만약 단 하나의 상을 제 인생에서 받을 수밖에 없다면 임화의 이름으로 주는 상이야말로 제일 받고 싶은 상 중 하나가 아닌가 싶었어요. 중심에 있었으면 오히려 안주했을지도 모르는데 소외되면서 논쟁을 한 게 저를 더 단련시켰을 거라고 덕담을 하시는 분도 있더군요.”

사실 권성우를 만나러 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그를 문단의 ‘공격수’로 만든 뿌리였다. 에두르지 않고 먼저 물었다.

“공격이라기보다는 작품을 볼 때 좋은 점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지적하는 게 비평의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자 임무라고 생각해요. 저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온순한 사람인데 어떻게 용기 있는 글을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용기가 있는 건 아니고 저에게 약간 반골 성정이 있지 않나 싶어요. 가장 온순한 사람이 가장 열렬한 투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운 좋게 대학 선생이 일찍 됐고, 흔히들 말하는 좋은 대학을 나와 혜택을 받으면서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약간 힘들고 때론 손해를 보더라도 할 말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명동에서 오퍼상을 하는 친척을 돕기 위해 경상도에서 상경한 부모가 명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 그를 낳았다. 명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흔치 않은 문인인 셈이다. 5층 옥탑에서 살았던 그의 집과는 달리 명동에는 살림집이 많지 않아 어린 시절 친구가 거의 없었다. 장난감과 친구가 없는 대신, 어머니가 사다준 계몽사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반질을 손때가 타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유하 감독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것처럼 친구들이 죽 둘러싼 가운데 그 원 안에서 둘이서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를 괴롭히던 동급생이 있었는데 참고 참다가 싸움판을 벌이게 된 거였다. 권성우가 그럴 줄 몰랐다며 실망한 여선생에게 가혹한 체벌을 받았지만 상대방에게서 더 피가 많이 났고 그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본인도 인정하는, 어느 정도 반골 기질을 타고났음을 부인하기 힘든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솔직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저 자신에 대해 스스로 분석해보면 뭔가 중심에 서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어요. 수업에 들어가도 절대 앞에 안 앉았어요. 지금도 무대공포증이 있는데 선생이 된 지 30년이 되어도 앞에 나가서 가르치는 게 어색하고 쑥스러운 면이 있어요. 제가 펴낸 책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그건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먼저 나서서 중심에 서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권성우는 자신에게 씌워진 전투적 이미지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비평의 균형을 시종 강조했다. 칭찬하는 비평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최소한 애정어린 비판을 하는 비평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평단은 칭찬만 있지 비판은 실종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웬만큼 평가를 받는 작가라면 설혹 한 에콜이나 출판사에 ‘소속’된 어떤 평론가가 비판을 하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는 다른 출판사로 옮겨갈 수 있으니, 비판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이야기다.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진보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정작 작품에 대해서는 비판을 자제하는 문예지의 모순도 이런 구조 속에서 가능한 셈이다. 그는 자신이 애정어린 비판을 하고 적극적인 옹호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고, 비판만 하는 비평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름대로는 애정을 담아 비판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참 논쟁은 쉽지 않는 것 같아요. 인구밀도가 높고 세 사람만 연결하면 다 아는 연고 문화에서 소신 있는 비판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작가들이 칭찬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의미 있는 비판조차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메타비평만 하고 작품론을 제대로 안 쓴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논쟁을 하면서 형성된 편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인훈 조세희 김석범 같은, 고전적 작가에 대한 가치를 정확하게 해석한 제 나름의 칭찬의 비평도 꽤 많이 썼거든요.”

동안인 권성우도 벌써 50대 중반이다. 3년 전 모친이 작고한 뒤 그 애절함을 페이스북에 올려 많은 폐친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따뜻하고 엄격했던 그 엄마의 다운그레이드 ‘미모’를 자신이 물려받았다고, 엄마의 사진을 여러 장 올리면서 그는 슬픔을 스스로 달랬다. 만년 청년 이미지여서 그가 결혼은 했는지, 자녀도 있는지 믿기지 않아 우문을 던졌더니 늦게 결혼해 얻은 슬하의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마음이 좀 젊은 것 같아요. 좋게 보면 열정이 있는 건데 약간 철이 없기도 하죠. 너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하면 고립되리라는 것, 패배하고 손해를 본다는 게 딱 보여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걸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고독한’ 비평가 권성우는 좋게만 말하지도 말고 너무 애정 없이 비판할 필요는 없지만 이 시대 한국문학의 성취와 결여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작업이야말로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말미에 거듭 강조했다. 비평가가 고독할수록 한국문학은 덜 외로워지는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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