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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문(進善門)에 신문고… “억울한 백성은 두드려라”

입력 : 2017-08-17 21:03:48 수정 : 2017-08-17 21: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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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읽는 창덕궁 이야기 / 임란 때 경복궁 소실 후 법궁으로 사용 / 왕실·국가행사 대부분 인정전서 열려 / 정조 18년 과거에 2만3900여 명 몰려 / 인정전서 금천교까지 늘어앉아 시험 / 영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 역대 왕 어진 모신 선원전 1405년 조선 태종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동쪽에 궁궐을 지었다. 바로 ‘창덕궁’이다. 그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비워둔 채 창덕궁에 기거했는데, 이후에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동군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쓴 책 ‘창덕궁 실록으로 읽다’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창덕궁에서 보낸 조선 왕들의 생활상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궁궐의 3문구조에서 두번째 중문인 진선문에는 조선시대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담디출판사
◆한때 노상방뇨로 더러워진 인정전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자 법궁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후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들은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리게 됐다. ‘조하’나 ‘조참’과 같은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행사를 비롯해 외국 사신들의 공식 접견, 과거시험도 인정전에서 치러졌다.

정조 18년(1794) 2월21일 실록에는 과거시험 당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인정전에 거둥하여 삼일제(三日製·3월3일에 보던 과거)를 거행하였다. 문 안에 들어온 유생의 숫자가 2만3900여명이나 되어 뜰에 전부 수용할 수가 없자 인정전 뜰에서 금천교 밖에까지 늘어앉도록 하였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서, 인정전 주변에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인정전이 더러워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광해 10년(1618) 10월9일에는 그런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인정전에서 전시(殿試)를 누차 거행하여 매우 더러워졌다. 소변을 보는 일 따위를 병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금하게 할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창덕궁은 1405년 조선 태종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은 궁궐이다. 태종은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비워둔 채 창덕궁에 기거했는데, 이후에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담디출판사
◆종묘와 함께 최고 지위 지닌 선원전


유교국가이면서 농경사회였던 조선은 ‘종묘사직’을 중시했다. 종묘사직은 선왕들의 위패를 둔 사당인 종묘와 토지·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말한다. 이런 종묘사직과 지위가 같은 건물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 있었다. 바로 ‘선원전’(璿源殿)이다.

선원전은 태조 이후 역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역대 왕들을 추모하면서 제향하는 건물로, 궁궐 밖에는 종묘를 짓고 궁궐 안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선원전이 가지는 지위는 영조 38년(1762)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待命·상부의 처분을 기다림)을 풀어주고, 동행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을 특파하고 다시 세자에게 행례하기를 재촉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는 비극적 사건을 기록한 기사다. 그런데 이런 큰 사건 직전에 선원전에 들러 선조들에게 고했다. 이는 선원전의 지위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신문고 설치된 진선문

진선문(進善門)은 궁궐의 3문구조에서 두번째 문인 중문(中門)이다. 진선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런 진선문에는 조선시대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태종 1년(1401) 8월1일 실록에는 신문고제도를 논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나와서 등문고를 치라고 명령하였다. …등문고를 고쳐 신문고라 하였다.”

그러나 궁궐의 중문에 설치한 신문고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궁궐은 일반 백성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당시 신문고를 이용하는 절차를 보면, 자신이 사는 관아를 거쳐 사헌부의 허가를 받은 뒤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지방에 사는 백성의 경우 자신이 사는 고을 원님과 도의 관찰사에게 확인서까지 받아야 했다. 이처럼 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신문고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신문고를 바로 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역모와 같은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는 사정기관을 거치도록 한 점이나 일반 백성이 접근하기 어려운 궁궐의 중문에 신문고를 설치한 점으로 볼 때, 일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닌 내부고발자 등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강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신문고는 남용을 막기 위한 규정이 있었지만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신문고의 실효성이 떨어져 폐지와 부활이 반복됐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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