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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현실 뒤엉킨 스토리, 복잡한 매듭 경쾌하게 풀어

입력 : 2017-08-17 21:01:58 수정 : 2017-08-17 21: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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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장편 ‘느빌 백작의 범죄’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는 딸이 있다. 그것도 아버지가 주관하는 가든파티에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57)의 스물네 번째 장편 ‘느빌 백작의 범죄’(열린책들·사진)의 설정이다. 정신병자의 요구가 아니고서는 납득하지 못할 행태이지만 작가는 신화와 현실의 착종 지점을 선택해 경쾌하게 이 매듭을 풀어나간다.

그리스 신화의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꼼짝하지 못하자 여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 딸 아피게네이아를 제단에 산 제물로 바친다. 노통브는 이 신화를 원용해 벨기에의 가난한 귀족 앙리의 딸 세리외즈가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간청하는 대목을 설정했다. 앙리는 의무에 사로잡힌 귀족으로, 식구들을 굶기면서도 가든파티에 사람들을 초청해 명예를 유지해온 선대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이 대목에서 노통브는 의무에만 도취된 인물의 허구를 다룬 오스카 와일드의 ‘아서 새빌 경의 범죄’를 오마주한다. 자신의 절대적인 명예가 걸린 마지막 가든파티에서 누군가를 살해하게 될 거라는 점쟁이의 예언이 그것이다.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던 세리외즈는 열두 살 반이 지나면서부터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로 변했다. 이 딸은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고 아빠에게 격렬히 대든다. 그네는 “듣고, 보고, 미각, 후각, 촉각도 있지만 그와 결합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서 “아빠는 제가 살고 있는 지옥이 어떤 건지 모른다”고 하소연한다. 어차피 손님을 죽일 운명이라면 차선으로 자신을 죽이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딸과 아빠의 대화는 코믹하기도 하다.

“제가 이 세상에 오는데 아빠가 큰 공헌을 하셨으니, 아빠 손으로 저를 직접 이 세상에서 제거하는 게 공정할 거예요.” “그런 논리라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네 엄마한테 그걸 요구해야지.” “아뇨. 엄마는 제가 태어날 때 이미 큰 고통을 겪었어요. 저에게 죽음을 줄 때는 아빠가 고통을 겪어야 공정하죠.”

풍자와 잔인함과 사랑스러움을 함께 녹여내는 노통브 특유의 서술방식이 깜찍하게 전개되지만 허무를 건드리는 만만치 않은 심연도 있다. “전 아빠를 우주에서 가장 좋은 아빠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질식해 가는 이 무(無)의 외피에서 절 해방시켜 주기로 하셨으니까. 잊지 마세요. 아빠가 범하게 될 일, 그게 저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될 거예요!” 과연 아빠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의 소원을 받아들여 손님 대신 그네를 죽이게 될까. 마지막 부분의 극적인 반전은 독서의 수고를 감당한 이들만의 몫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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