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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저분이 긴즈버그, 나는 오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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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3 21:44:13 수정 : 2017-08-13 21: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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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첫 복수 女재판관 시대 눈앞
美 대법원 탈의실 女화장실 확충
女대법관 2명일 때 겨우 이뤄져
1명일 때와 2명일 때 차이 매우 커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RBG란 약칭으로 불리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1993년 미국 역사상 여성으로는 두 번째 연방대법관에 임명됐을 때의 일이다.

워싱턴 연방대법원 청사에 전국여성판사협회가 보낸 티셔츠 2장이 도착했다. 하나는 ‘내 이름은 루스’, 다른 하나는 ‘내 이름은 샌드라’라고 적혀 있었다. 샌드라는 긴즈버그보다 12년 먼저 대법원에 입성한 ‘미국 여성 대법관 1호’ 샌드라 데이 오코너(1981∼2006년 재임)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지난해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된 긴즈버그 전기 ‘노터리어스(악명높은) RBG’에 따르면 이는 그저 여성 대법관이 2명으로 늘어난 것을 기념한 선물이 아니었다. 동료 대법관이나 변호사, 법정의 방청객들이 둘을 서로 헷갈릴 수 있으니 잘 구별하라는 경고였다.

오코너는 키가 크고 체구도 당당한 편이다. 공개석상에서 안경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긴즈버그는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집이다. 얼굴의 거의 절반을 가리는 짙은 색 뿔테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웬만해선 둘을 혼동하기 힘들 것 같은데 여성 법관들의 우려는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1997년 저명한 중견 변호사가 대법원 변론 도중 그만 오코너를 향해 ‘긴즈버그 대법관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법정 정면 판사석에 긴즈버그와 제법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오코너는 즉각 속기록 수정을 지시하며 “저분이 긴즈버그 대법관입니다. 나는 오코너 대법관이고요”라고 응수했다. 솔직히 여성 대법관이 한 명뿐이거나 3명 이상이었다면 범하지 않을 실수다. ‘한 사람은 긴즈버그고 다른 한 사람은…. 아, 누구더라.’ 뭐든 둘일 때가 가장 헷갈리기 쉬운 법이다.

1988년 출범한 한국 헌법재판소는 25년이 지나 첫 여성 재판관을 받아들였다. 1789년 문을 연 미국 연방대법원에 첫 여성 대법관이 탄생할 때까지 걸린 192년보다 훨씬 짧은 기간이다. 문제는 여자가 항상 혼자였다는 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한 역사적 선고 장면을 떠올려 보면 여성인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가운데 앉고 양옆으론 모두 남성 재판관이었다.

미국은 1981년 오코너, 1993년 긴즈버그,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 2010년 엘리나 케이건 순으로 여성 대법관이 등장했다. 오코너는 12년간 대법원의 유일한 여성이었고 그가 은퇴한 2006년부터 3년 동안은 긴즈버그가 홀로 여성 대법관 자리를 지켰다. 이후 소토마요르와 케이건의 합류로 지금은 대법관 9명 중 3명이 여성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8년 임기 동안 임명한 2명의 대법관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 헌재는 2003년 전효숙, 2011년 이정미, 2017년 이선애 재판관이 차례로 취임했지만 이들은 근무 기간이 전혀 겹치지 않는다. 2명 이상의 여성 재판관이 동료로서 함께 일한 적이 이제껏 없다는 뜻이다. 여성 재판관은 늘 9명 중 한 명뿐이었다. 2005년 자녀한테 어머니 말고 반드시 아버지 성을 물려주도록 한 민법 조항이 위헌 심사대에 올랐을 때 전효숙 재판관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아버지 성을 강요하는 부성주의는 양성평등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의견을 냈다. 동료 남성 재판관 중 딱 한 명만 그에게 동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석인 행정부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이유정 변호사를 지명했다.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정식으로 취임하면 헌재 역사상 처음 복수 여성 재판관 시대가 열린다. 여성이 한 명뿐일 때는 ‘아, 저 사람이 이선애 재판관이구나’ 하고 쉽게 알아보던 방청객도 여성이 2명이면 처음엔 누가 누군지 몹시 헷갈릴 것이다.

오코너는 취임 후 12년간 갑자기 볼일이 급할 때 개인 화장실이 있는 집무실까지 뛰어가야 했다. 1935년 지어진 옛 건물인 대법원은 원래 여자화장실이 적은 데다 대법관들이 변론을 위해 법정에 입장하기 전 법복으로 갈아입는 탈의실 부근은 아예 여자화장실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긴즈버그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탈의실 곁에도 여자화장실이 생겨났다. 오코너와 긴즈버그가 힘을 합쳐 “당장 화장실 보수공사를 시작하라”고 대법원장을 압박한 결과였다. 혼자일 때와 둘일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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