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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文星 떨어지니”… 울분과 슬픔 속 조국독립의 염원 가득

입력 : 2017-08-12 11:00:00 수정 : 2017-08-12 09: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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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수당고택서 찾은 신채호 애도사 오늘도 장서각 수장고 철문 앞에 선다.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육중한 철문을 연다. 다시 두 내문의 잠금을 풀고 나서야 비로소 수장고는 자신이 품고 있는 전적들을 보여준다. 높은 천장, 넓은 공간에 가득 찬 서가와 전적들. 고서와 고문서들에서 풍겨오는 오래된 종이향기,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가동되는 설비들의 낮은 진동소리. 수백 년 역사를 품고도 평온한 수장고의 풍경 앞에서 경외를 느낀다. 사실 수장고가 품고 있는 전적들에 담긴 수백 년의 역사는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다. 나라와 민족은 물론이고, 가문과 개인의 역사와 장면들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도하지 못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국학자·독립운동가 안확(1886~194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자산 안확(安廓·1886~1946)이 자필로 쓴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에 대한 애도사를 발견할 때가 그랬다. “문성(文星)이 떨어지니 하늘빛이 뒤집힌다. 만주 땅(胡地)이 무덤이 되어 신단재가 죽었다는 말인가. 세상이 어지러운 속에 한스럽기가 끝이 없구나.” 아 슬프다. 선철(先哲)의 뒤를 이을 이 그 누가 있으랴. 

독립운동가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6편의 논문을 묶어 ‘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장서각의 다섯 수장고 가운데 제1수장고는 민간으로부터 조사, 수집한 고서와 고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56개 소장처로부터 수집한 4만여 점의 전적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지난 40년간 30만점이 넘는 전국 각지의 전적 문화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 가운데 ‘예산 한곡 한산이씨 수당고택 전적’이 있다. 수당고택은 한말의 의사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 선생의 생가로, 17세기 이후 생산된 4000여점에 달하는 고전적이 전래되어 온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제6대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이문원 선생이 관리하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조사와 정리를 의뢰했다. 장서각에서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자료를 조사하였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 있는 수당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81호).
문화재청 제공
예산 한곡의 한산이씨가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름 높은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서화에도 능했던 아계 이산해 등을 선조로 하는 조선의 명문가이다. 특히 수당 이남규 선생부터 아들 이충구와 손자 이승복, 그리고 증손 이장원에 이르는 4대가 일제강점과 6·25전쟁의 국난극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절의 명문가이다. 이남규 선생은 한말의 유학자이자 관료로서 1894년부터 일제의 무도함을 규탄하였고, 1900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고 일제와 결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의병장 민종식이 일본군에 패한 후 은신을 도운 일로 공주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결국 1907년 8월 19일 아들 이충구와 함께 온양의 평촌점 인근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일제의 손에 잃은 이승복 역시 국내외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에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중이었으며, 이후 1978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해방된 조국의 정치와 언론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승복의 아들 이장원은 1951년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최전선인 함경남도 영흥만의 5개 도서를 장악하고 있던 해병대 소대장으로 부임, 병력과 화력의 열세 속에서도 섬을 수호하였으며, 전투 중에 적의 폭탄에 전사하였다. 수당가문은 4대가 현충원에 모셔진 대한민국 유일의 가문이다. 

신채호 동상
수당고택의 전적 속에서 신채호 애도사를 발견한 것은 2016년 4월의 일이었다. 증손 이장원이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어 그의 동생인 이문원 선생이 ‘2016년 6·25 전쟁영웅 선정패 수여식’에 참석했다가 겸사겸사 장서각에 들렀다. 이문원 선생은 기탁한 자료 일부를 찾아가길 원했고 해당 자료 50여점의 목록을 필자에게 건넸다. 필자는 수당고택에서 기탁한 4000여점에 달하는 자료를 확인해 나갔다. 하얀 장갑은 오랜 세월 묵은 먼지에 금방 얼룩지고, 오래된 책들의 냄새와 먼지들이 마스크로 가린 코와 목을 간지럽혔다. 그중 20세기 초에 제작된 색 바랜 작은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표제가 붙어 있어야 할 자리는 흔적만 남아 있다. 첫 장을 넘기자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표지가 없다. 귀한 책은 아니었다. ‘조선사연구초’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6편의 논문을 묶어서 1929년에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와 더불어 1920년대에 집필된 신채호의 대표적인 역사학 저술이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중세사학을 극복하는 근대사학의 시작이자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 사학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일찍이 이남규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다. 신채호가 20세 무렵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이남규는 성균관 교수로 경학을 가르쳤으며, 이남규가 첫 번째 제자로 꼽던 인물이 신채호였다 한다. 수당고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사연구초’가 갖는 의미가 각별해지는 이유이다.

허원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책의 끝부분, 판권지를 살펴본다.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한 초판본이다. 그런데 판권지 옆면에 빛바랜 짧은 시구가 기록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도신단재’(悼申丹齋), 즉 신채호의 죽음에 대한 애도사이다. 작자는 ‘안자산’(安自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일제강점기 국학자이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문학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자산 안확이다.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신채호가 사망한 1936년 2월 무렵일 것이다.

신채호는 1929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되었고, 1936년 2월에 뤼순감옥의 독방에서 뇌일혈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 시기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무단통치가 점점 심해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암흑기에 전해진 신채호의 옥사 소식에 대한 비분을 이렇게 기록했으리라.

단재와 수당선생의 인연은 이미 1900년쯤에 맺어졌지만, 단재 및 자산과 시대와 정신을 함께한 수당고택가의 인물을 꼽는다면 이승복일 것이다. 1907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조부와 부친을 동시에 일본군의 손에 잃은 이승복이었다. 이후 이승복은 3년 상을 치르고, 서울에서 신학문을 수학한 후 1913년 러시아 망명길에 오른다. 19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후 국내외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매진해 나갔다. 박은식과 더불어 ‘청구신문’을 간행하였으며, 신간회의 창설과 운영에 핵심인사로 참여하였고, 재만동포 구호활동 등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한산이씨 수당고택에 가전된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한 권, 그리고 그 여백에 쓰인 안확의 애도의 글을 살펴보며, 이남규와 그의 손자 이승복, 신채호와 안확이 몸은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그 활동과 바람이 한결같았음을 떠올린다. 일제강점의 암흑 속에서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었고 염원을 모아 광복을 이루었던 때로부터 어느덧 72년이 지났다. 오늘날 우리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리하여 결국에는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읽는다.

허원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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