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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없음은 강력한 존재의 방식… 깨달음 주는 ‘空의 미학’

입력 : 2017-08-12 09:56:26 수정 : 2017-08-12 09: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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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부재
경남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통도사 . 한국의 3대 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에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시간의 궤적이 바닥에 깔려 있으며, 불교의 핵심사상과 한국의 독특한 종교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한 영화, 블로우 업

나는 영화를 상당히 편식한다. 무서운 영화나 피가 튀는 영화는 일단 제외하고, 지나치게 흥행이 잘 되는 영화도 제외하는 등의 몇 가지 기준을 세워놓고 고르다 보면 막상 볼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게으른 편이라서 저건 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벼르다 못 보는 경우가 많다. 주로 보는 영화는 스토리 전개가 아주 느리거나 거의 없는 심심한 영화들이다. 말하자면 자극이 아주 약한 흰 쌀밥이나 바게트 빵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 현실의 세상이 오히려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자극이 많아서 그러려니 생각한다.

또는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어린 시절, 그런 영화부터 보기 시작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20세기 중반에 크게 활약했던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그런 면에서 나에겐 안성맞춤이다.

그가 만든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인 대사가 없고 음악도 절제되고 내용의 파악이 잘 되지 않는 그런 졸리고 따분한 분위기가, 처음에는 무척 생경하고 적응하기 힘들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묘하게 빠지는 매력이 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존재와 부재’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이 그의 영화에서는 마구 섞인다. 갑자기 사람이 없어지거나 느닷없이 삶을 지탱해주는 배경이 무너지기도 한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 경향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 1966년에 만든 ‘블로우 업(Blow-Up)’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내가 아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 중 드물게 컬러필름으로 만든 영화이기도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주말의 명화에서도 그 제목으로 방영했다.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무척 궁금하지만 아직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배경은 영국이고 내용은 무척 잘나가는 사진작가가 겪는 일상적이지 않은 작은 사건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사진기에 담는, 그래서 뭐든지 실재하는 것만을 믿는 사진작가 토마스는 성공한 사진작가이다. 패션사진을 전문으로 찍는데 그에게 사진 찍고 싶은 모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그는 대상에게 무척 냉정하게 대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사진을 뽑아낸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후 허탈해진 그는 일탈을 꿈꾼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 한다. 그는 정열이 빠진 듯 멍한 눈초리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풍경과 사람들을 사진에 담는다.

어느 날 우연히 들른 공원에서 연인으로 추정되는 남녀를 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이 찍혔다는 것을 눈치 챈 여자가 그를 쫓아온다. 집요하게 필름을 요구하는 여자에게 그는 가짜 필름을 넘겨준다. 그리고 공원에서 찍은 필름을 인화해본다. 인화된 사진 안에는 그가 본 남녀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몰랐던 상황이 보인다. 나무 뒤에 총을 든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진을 계속 확대해본다. 숲속에 누워 있는 남자의 발이 보인다. 그는 공원으로 달려간다. 공원 나무 밑에 시체가 있다. 그러나 사진기를 가지고 가지 않아 그것을 기록하지 못한다. 돌아와 보니 그가 찍은 사진들이 사라졌고, 다시 사진기를 들고 공원에 가지만 시체는 이미 없어져 있다.

# 상(相)은 상이 아니고, 존재가 없음을 알게 될 때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허탈하게 돌아가는 그의 등 뒤로 공원에서 판토마임을 하는 한 무리가 있다. 그 무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나타났는데, 토마스는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말을 하지 않고 동작만 하는 판토마임 배우들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허구이다.

토마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보았고 죽음을 기록했음에도, 어디에서도 자신이 본 것을 증명할 수 없다. 허무하게 걸어가는 그를 테니스장 안에 있는 판토마임 배우들이 부른다. 울타리 밖으로 넘어간 공을 주워달라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공을 주워서 그들에게 던지고 돌아선다. 그리고 공이 라켓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가지는 믿음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작년부터 금강경을 돌에 새기고 있다. 무엇인가를 가장 천천히 읽는 것은 필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돌에 새기는 것은 ‘가장 천천히’, 보다 더 느린 속도로 불경을 읽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5000자가 넘는 금강경을 1년에 걸쳐 5분의 1 정도 새겼으니 앞으로도 4~5년은 더 새겨야 할 판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始我聞)로 시작하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석가모니가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발을 씻고 마음을 차분히 정리한 후 기원정사에 앉아서 그가 아끼는 제자 수보리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金剛)이라 하고,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리고 실행을 의미하는 바라밀이 합쳐진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공(空)사상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불교의 경전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공(空)과 무(無)가 반복되는 반야심경과는 대조적으로,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금강경에서는 공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공을 설파한다. 대신 상(相)이라는 개념이 많이 나온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상이라는 개념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을 말한다. 누구나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바라보면 그에 대한 이미지나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그때 생긴 개념이나 이미지를 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상을 만드는 것은 다시 말해 인식의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은 자칫 인식을 틀 안에 가두게 되고, 사물의 본질을 깨닫는 데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런 프레임을 걷어낼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라고 추정한다. 나는 느리고 둔한 독서로 천천히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모양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이 모양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금강경의 한구절을 돌에 새겨봤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모양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이 모양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결국 상은 상이 아니고, 존재가 없음을 알게 될 때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금강경 안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상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경전을 돌에 새기는 나의 행위는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일이다.

없음을 이야기하기는 정말 쉽다. 책임회피로도 쓰이고 얼버무릴 때도 많이 쓰인다. 그러나 없음의 의미를 알기는 무척 어렵다.

# 없음으로 가득한 세계, 통도사

내가 알기로 가장 강력한 부재를 볼 수 있는 곳은 통도사이다. 통도사는 경남 양산에 있다. 나는 그곳에 여러 번 갔었다. 그래서 그곳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활달한 배치나 각 전각의 구성도 알고 있고 공간의 분위기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난달부터 근처에 집을 짓고 있어서 현장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십여 년 만에 가본 통도사는 내가 아는 통도사가 아니었다. 마치 좋은 소설이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는 것처럼, 오랜만에 본 통도사는 내가 그 전에는 보지 못한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본 통도사는 통도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영축산 아래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진신사리를 모신 절이라고 한다. 통도사라는 이름은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라는 의미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불교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절이라는 의미를 크게 강조한 듯하다.

통도사는 우리나라의 삼보사찰 중 하나로, 승보사찰 송광사,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불보사찰이다. 경내에 무척 많은 집을 세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부처와 보살을 다 모시는 곳이다. 석가모니의 대웅전이 있고,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 있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광명전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전, 약사불을 모시는 약사전 등등, 과거불, 현세불, 미래불까지 다 모셔져 있어 말하자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만다라가 구현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의 핵심에는 ‘부재’가 존재한다. 부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청난 패러독스이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강력한 존재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통도사이다. 통도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가 없다. 마땅히 있어야 할 대웅전 대좌에는 빈 방석이 하나 놓여 있다. 방금 앉아 있다 떠난 듯 온기도 느껴지고 방석에 앉은 자국까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건 통도사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보관한 탑이 부처님의 방석 너머로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너머, 통도사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다.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굳이 대웅전에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통도사는 상·중·하로전(上·中·下爐殿) 세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영역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인 표현은 무척 분방하고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시간의 궤적이 바닥에 깔려 있으며, 불교의 핵심사상과 한국의 독특한 종교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또한 그 중심에는 ‘부재의 미학’이 아주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현세불인 석가모니는 텅 빈 대웅전의 방석으로 표현되어 있고, 앞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구제할 예정인 미래불인 미륵불은 용화전에 있다. 물론 용화전 안에는 미륵불의 불상이 있긴 하지만, 그 불상보다 용화전 앞에 놓여 있는 돌로 만든 봉발탑이 무척 특이하다. 봉발탑은 석가모니가 제자인 가섭에게 열반에 들지 말고 이것을 앞으로 올 미륵불에게 전하라고 한 그 밥그릇이다. 그래서 결국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도 없고 미륵불도 없다.

간혹 중창불사를 한 사찰들을 가보면 으레 새로 지은 반듯한 전각과 불상이 기존의 가람과 어색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오히려 더 큰 덩치를 자랑하며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풍경을 볼 때가 있다. 그 ‘상’이 마치 사진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았듯이, 불안한 현실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종교적 믿음을 이끌어내는 장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상을 없앰으로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통도사에서는 부재의 건축을 통해 진리로 통하는 길을 보여준다. 없음은 가장 강력한 존재의 방식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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