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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나는 ‘쑥뜸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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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1 20:57:05 수정 : 2017-08-11 23: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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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앞으로 읽게 될 건 보잘것없는 내 군대 얘기다.

난 의무소방원으로 입대해 처음 1년간 지방의 한 소방서장 관용차를 운전했다. 의무소방원은 의무경찰처럼 소방서에서 먹고 자며 소방관 업무를 보조하는 군역이다.

내가 모셨던 A서장은 자기관리 능력이 유달리 뛰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강’ 관리에 골몰했다. 서장실 부속실 직원은 매일 아침 마늘을 구워 A서장에게 내놨다. 물도 까다롭게 골랐다. 매주 두 번씩 소방서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약수터에 가 A서장이 마실 물을 떠오는 건 내 업무였다.

김승환 산업부 기자
정점은 쑥뜸이었다. A서장은 봄, 가을이 되면 보름 가까이 밤마다 인근 산에 들어가 쑥뜸을 떴다. 그는 3평 남짓한 황토방에 러닝셔츠와 팬티만 입은 채 누웠다. 그 옆에 앉은 게 나였다. 나는 잘 말린 쑥을 작은 원뿔 모양으로 뭉쳤다. 그럼 A서장이 자못 비장하게 러닝셔츠를 살짝 들어올렸다. 난 쑥 뭉치 하나를 그의 배꼽 부근에 올리고 불붙은 향을 갖다 댔다. 푸르죽죽한 쑥 뭉치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난 그걸 멍하니 쳐다보다 다 타고 남은 재를 준비한 붓으로 조심스레 쓸어냈다. 재가 사라진 자리엔 화상이 남았다. 그 자리에 다시 쑥 뭉치를 올렸다. 서장 컨디션에 따라 1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씩 쑥을 뭉치고 태우길 반복했다.

A서장은 좋은 걸 나눌 줄 알았다. 소방서 간부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면 어김없이 ‘쑥뜸 찬가’를 불렀다. 누군가 관심을 표하면 친히 배를 까 500원 동전 크기만 한 화상 자국을 보여줬다. “인내심이 진짜 대단하시다”, “저는 겁나서 못 하겠다”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어떤 날은 서장이 뜸 뜨는 법을 한창 설명하더니 구석 자리에 앉은 날 가리키며 “김승환이가 처음엔 어설프더니 이제 ‘뜸 도사’가 다 됐어. 돈 받아야 돼”라고 했다. 누군가 “서장님 쉬실 때 제가 승환이 좀 빌려 가야겠네요” 하자 식사 자리에 웃음꽃이 폈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칭찬이 부끄러워 그랬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모멸감이었다. 그래도 난 “하하” 소리내 웃었다. 얼굴색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도 난 서장의 배에 쑥 뭉치를 올렸다. 어쨌든 난 군인이었으니깐, 그땐 그렇게 여겼다.

최근 박찬주 대장 부부의 ‘갑질’을 알리려 언론 인터뷰에 나선 청년을 보고, 그날을 떠올렸다. 잘못인지 몰랐거나 알아도 애써 무시했던 그 간부들에 섞여 속없이 웃던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의 나도 누군가의 부정을 모른 척하거나, 아니면 직접 부정을 일삼으면서 실없이 웃음꽃이나 피우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10년이 다 된 군 생활을 늘어놓은 건 명징한 사실 하나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사족 하나. A서장은 남다른 자기관리 때문인지 지금도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 중이다. 요즘도 뜸을 뜨는지 궁금하다. 그렇더라도 이제 부하 직원의 손은 빌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김승환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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