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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특수외국어진흥법과 우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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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28 20:53:36 수정 : 2017-07-28 20: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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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의존도 80% 넘는 한국의 현실
세상 구석구석 살펴 교역·협력 해야
‘53개 언어 습득’ 제대로 안착되길
영국 유학시절, 은퇴를 앞둔 대사의 고별 강연에 참석했었다. 강연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영국 외교부 후배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임지가 어디인가를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중동이라 답했다. 이유는 간명했다.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외교관으로서 다양한 정치체제, 테러와 난민, 종교 및 석유 등 숱한 쟁점을 다룰 수 있어서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영국의 미래 이익이 있노라 부연했다. 선진국과의 외교가 ‘유지와 관리’에 중점이 있다면, 개도국이나 특수지역 외교는 ‘도전과 기회’를 본다고 말했던 기억이 오래 남는다.

몇 년 전, 터키 외교부의 한 중견 간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인사 발령을 앞두고 있었고 본부 주요 보직들을 역임했기에 선호하는 국가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로 부임하느냐 물었더니 자원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간다고 했다. 수도 카불도 아니고 북부 도시 마자리 샤리프의 영사관으로 부임한다고 했다. 그는 현지 공용어인 다리어와 파슈토어를 익혀왔다고 했다. 당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이 주둔하며 아프간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터라 터키 외교관들도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험지를 자원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외교의 최전선에 있고 싶다고 했다. 분쟁 속에서 자국민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미주연구부장
이 두 외교관은 영국과 터키, 즉 대영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후예다. 세상은 바뀌어 제국은 멸망했지만 이처럼 제국의 후예들은 변경(邊境)을 찾는다. 불편을 감수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로 간다. 발굴되지 않은 국가이익이 존재할지 모를 미지의 땅에 눈길을 둔다. 반면, 전부는 아니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이들 중 일부는 본능적으로 세상의 중심(中心)을 지향하곤 한다. 험한 시절을 겪었기에 안정되고, 좀 더 살기 편한 세상을 찾고픈 성정(性情)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제국의 후예와는 뭔가 다르다.

21세기 한복판에 서서 ‘제국’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이다. 약탈적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망령이 살아날지 모르기에 더욱 조심할 일이다. 하지만 세계에 잇대어 생존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남다른 메시지가 있다. 대외의존도가 80%를 훌쩍 넘는 한국은 세상 끝으로 더 나아가야 하기에 그렇다. 패권적 제국은 금기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제국보다 더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 교역과 협력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운명을 마주하고 있다. 언필칭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며 중견국으로서 다양한 국제협력을 모색해 온 이유다. 물론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우리는 엄중한 분단 현실 속에 살고 있기에 주변 4강을 넘어서는 시선을 갖기가 어렵다. 익숙지 않은 세계는 여전히 미지의 땅, 미래 시제로 미루어져왔다.

작년 초, 국회로부터 눈에 띄는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특수외국어진흥법’이 제정됐다는 것이었다. 시행령 마련을 거쳐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이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법은 중동권 12개 언어를 비롯해 유라시아, 인도·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유럽 및 중남미를 망라하는 총 53개 언어를 특수외국어로 지정하고 있다. 대략 생경한 언어들이다. 지역에 접근해 뿌리를 내리는 첫째 조건이 언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반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법안의 취지를 온전히 살리면서 제도로 안착시키기까지는 적지 않은 장애물이 있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 극복, 특정 대학이나 기관의 수혜 독점 방지, 특수외국어 사용 수요의 확대, 그리고 단순 통번역을 넘어서는 지역 이해의 심화 및 현지 네트워크 확충 등의 과제가 앞에 놓여있다. 장기적으로는 100여개 언어와 지역학을 가르치는 프랑스의 동양어문화대학 ‘이날코’ (INALCO) 같은 국립 외국어학교 설립도 생각해볼 만하다. 일단 방향은 잘 잡았다. 파도를 헤치며 이 법이 순항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한국은 더 이상 은자(隱者)의 나라가 아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미주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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