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은 ‘먼데서 오는 여자’, ‘3월의 눈’의 극작가 배삼식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작품은 1945년 해방 소식이 전해진 때가 배경이다.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로 모여든다. 열차 소식은 까마득하고 길에 떨어진 나무판 하나 남아나지 않을 만큼 물자도 부족한데 겨울은 점점 다가온다.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명숙이 임신한 미즈코와 함께 열차에 무사히 오를지를 큰 줄기 삼아 이야기를 푼다. 기차에 탈 수 없는 일본인인 미즈코는 말을 못하는 척하며 신분을 숨긴다. 이들이 극을 끌고 가지만 특별한 주인공은 없다. 씨줄날줄처럼 엮인 모든 이들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전재민 구제소에는 위안소 포주였다가 아편중독이 된 선녀, 해설자 역할을 하는 아이들인 철이와 숙이, 조선인 학교 선생이었던 유약한 지식인, 아이들을 일본인 학교에 보냈던 억척 엄마 등 다양한 인물이 모여든다.
작품은 쉽사리 과거를 단죄하지 않고 섣불리 미래의 희망을 그리지 않는다. 인물들은 “다들 험한 시절을 산 거야. 죄를 묻자면 우리 모두 죄인이지” “그때 못할 짓 많이 했다… 살자, 제발 나도 좀 살자”라는 대사들을 자주 내뱉는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전재민 구제소를 통해 작가는 약자들의 연대와 인간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시선도 인상적이다. 명숙은 “당신이 뭔데 우릴 데려가구 버리구 한다는 거야? 씻어 줘? 우리가 더럽다구? …이 아이도 나도 깨끗해.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 그 눈이지”라고 외친다. 피해 여성들을 보호할 누이이자 약자로 바라봤던 과거의 민족 담론을 벗어나 이들의 주체성과 생명력을 강조한다.
송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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