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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야사 복원과 역사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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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2 23:25:19 수정 : 2017-07-12 23: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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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해 맞은편인 일본 서북쪽 후쿠이현 바닷가. 후쿠이현 육지 깊숙한 속으로 움푹 파고들어간 와카사만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큰 물굽이 내해이다. “머리통에 두 뿔이 달린 대가야의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가 배를 몰아 와카사만의 ‘쓰루가’로 건너왔다”(‘일본서기’ 스이닌천황조 BC 30)는 일본 기사 때문이다. 와카사만의 쓰루가역 광장에는 이 같은 발자취를 고증하듯 머리 위에 두 뿔이 솟구친 묵직한 투구를 쓴 쓰누가 아라시토의 동상이 서 있다.

한반도로부터 왜(倭) 땅으로 벼농사가 전해지기 전까지 왜의 선주민은 채식을 했고 쌀밥을 몰랐다. 고대사학자 비토 마사히데 교수는 “일본에서는 BC 3세기경부터 AD 3세기경 사이에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 벼농사법과 금속기의 기술을 가지고 도래해 모든 것을 가르쳐 줬다. 일본에서는 조선 도래인들로부터 배운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금속기와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하게 된 시기를 일컬어 야요이 문화시대라고 부른다”(尾藤正英 ‘日本史’ 東京書籍, 1991)고 했다.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 석좌교수
와카사만 쓰루가 중심지에는 일본왕실이 세운 게히신궁(氣比神宮)이 있는데 유명하다. 게히신궁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천일창(天日槍) 왕자를 최고의 신으로 떠받들며 제사를 모시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후쿠이대 이마키 구니오 교수는 “후쿠이현의 국가 사당으로 숭경받아온 게히신궁은 천일창 왕자를 큰 신주로 모셔 떠받들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고장에서는 천일창 왕자가 모든 사람에게 식량을 베풀어주는 벼농사 천일창 대신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며, 천일창 대신은 이곳을 지배했던 토호 쓰누가 아라시토 가문의 조상신이었다”(印牧邦雄 ‘福井縣の歷史’, 1965)고 밝혔다.

스이닌 천황 3년 3월, 신라왕자 천일창은 여러 가지 옥제품, 곰신단, 해거울 등 귀중한 7품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와 스이닌 천황에게 건넸다. 천일창은 스이닌 천황에게 “제가 살 터전은 제가 직접 돌아다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정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천황은 “마음대로 정하세요”라고 했고, 천일창은 하리마(효고현) 등 일대를 택해 살게 됐다고 한다.

필자는 25년 전 효고현과 후쿠이현 일대를 답사하면서 게히신궁에도 가 천일창 대신의 신전에 참배했다. 이때 나는 게히신궁의 역사가 담긴 고문서(‘氣比神宮社記’ 13C)를 직접 읽어 보았는데, 고문서에는 ‘게히신궁은 식령대신(食靈大神) 신라 천일창 왕자를 최고신으로 제사모셔 온다’고 써 있었다. ‘식령대신’이란 온 백성에게 귀중한 식량을 베풀어주는 큰 신이라는 뜻이다. 이는 천일창이 일본으로 건너가 쌀밥을 모른 채 채식을 하는 왜인들에게 벼농사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천일창을 식령대신으로 모시는 게히신궁에는 대가야왕자 쓰누가 아라시토의 신주도 제사모시는 쓰누가신사도 있다. 민속학자인 무토 마사노리 교수는 “와카사만의 지명인 와카사(若狹)는 가야이며, 신라인들이 늘 오고 간 데서 ‘와갔소’라는 뜻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지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가야사 연구에 힘을 실어 가야사 공백으로 인해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 등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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