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에 대한 관심은 유학자 집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 일컬어지는 간재 전우 선생의 후손으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흰색은 조선 선비들이 심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색으로 숭상했다. 성리학자 중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하얀 비석을 묘비로 쓸 만큼 흰색을 중히 여겼다.”
사실 간재는 조선 성리학을 순수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지금도 성균관 등에서 그의 연구가 진행될 만큼 학문이 깊은 인물이다.
“지난 20여년을 ‘오로지 색으로 남고 싶다’는 말로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 간재 선생이 성리학으로 그것을 추구했다면 나는 그림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색으로 남고 싶다는 전병현 작가는 오방색으로 불교의 정신세계를, 흰색으로 유교의 심상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맑고 담백한 모습에서는 그리스도의 순결정신도 어른거린다. 왼쪽은 전병현 작가의 신작 ‘Appear-Blossom’. |
“내가 요즘도 계속해서 인물화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유다. 한국초상화의 맥을 잇고 싶어서다.”
근래 그는 지인들의 눈감은 표정을 그린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전시제목처럼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다시 말해 형상 이면의 정신세계를 터치하고자 했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그의 그림은 흰 달항아리에 꽂힌 매화그림이다. 한지 죽을 이용해 입체감 있는 부조처럼 만들고 그 위에 색을 칠했다. 물론 흰색이 화면 전체를 조율하고 있다.
“한때는 흰색의 아우라를 위해 석회석 하얀 가루를 가지고 벽화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중엔 순백의 아름다운 유백색을 얻기 위해 하얀 대리석 가루도 이용했다.”
그가 오는 7월16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또 다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그 위에 한지를 붙여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작품이다. 보통 여섯번을 반복한다. 여섯겹의 그림은 마지막으로 찢어발겨진다. 스며든 속살들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찢긴 한지는 나풀거리며 입체감을 만들며 꽃과 사람이 되고 풍경이 되고 추상이 된다.
“물론 흰색이 전체 화면을 아우르고 있다. 흰색의 순결성은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여전히 그는 흰색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얀 세마포의 순결, 고귀함 같은 영혼의 색이다.
그는 프랑스 유학 중에 만난 이응로 화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지 위에 수묵으로 그린 군상시리즈를 보고 한지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서예도 익혔다.
“세계적인 작가 슐라주와 트웜블리와도 친분이 있었던 이응로 선생은 그들이 동양의 서예나 도자기 등의 이미지와 철학적 사고를 차용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적잖이 놀라셨다고 했다. 문자추상도는 당시 선생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나도 슐라주가 동양의 서예를 보고 선을 추상화시켰고 또 다른 추상 작가 중 한 사람인 켈리가 한국문화를 차용한 것을 접하곤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한지작업이 자신에게 맞는 옷이란 것을 알게 됐다. ‘흰옷’ 여정이 그렇게 탄생됐다. 스며든 색들이 흰색을 길라잡이 삼아 배어나오고 있다. 영혼의 추출물이 그림으로 변하는 풍경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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