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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꾸고자 했던 세 소녀… 그들은 용감했다

입력 : 2017-06-22 20:49:47 수정 : 2017-06-22 20: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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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 다룬 조선희 소설 ‘세 여자’ 조선희(57) 장편소설 ‘세 여자’(한겨레출판)는 세 여자의 삶을 축으로 한국 현대사의 뿌리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이들 세 여자는 모두 1900년 어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로 살았고 해방공간과 전쟁 국면을 거치면서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죽었거나 평양에서 오래 살아남았던 인물들이다. 북한에서 김일성 측근으로 권력을 누렸던 허정숙은 당대의 페미니스트이자 혁명가였고, 주세죽은 박헌영의 아내이자 김단야의 두 번째 아내였지만 두 남자 모두 미제와 일제의 스파이로 처단당했다. 고명자는 해방공간에서 돋보였던 여운형의 사랑받는 ‘수양딸’이었으나 6·25전쟁 와중에 쓸쓸하게 홀로 죽었다. 여성들이 삼종지도의 사슬에 묶여 숨죽여 살아야 했던 시절에 드물게도 활달하게 시대에 투신했던 여성들로 각기 다른 운명을 맞아야 했던 독특한 존재들이다.


이 소설은 조선에 공산주의를 세우려 했던 이들의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본다. 그동안 남쪽의 시각에서만 일제와 해방공간과 전쟁과 분단을 보았던 데 비해 다른 시각으로 한반도 비극의 전개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입체적으로 지난 역사를 생생하게 조명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작가는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할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시각이다.

조선희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고 분석한다. “김구, 김규식이 평양에서 가져온 공동성명은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들의 잠꼬대가 되고 말았다. 남북연석회의 스타일은 그럴싸했으나 결국 하나의 역사적 푸닥거리로 남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미 단독정부 차려놓고 느긋하니 민족해방자 코스프레하면서 통일정부를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을 챙겼다. 이승만은 총선에서 어떻게 뒤집기를 해서 정권을 잡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라 통일협상 어쩌고 하는 모양새 따위는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반, 청계천쯤으로 짐작되는 서울의 냇가에서 과감하게 단발을 한 세 여성이 놀고 있다. 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허정숙을 따라가면 북쪽에 어떻게 김일성 정권이 세워지게 되는지 선명하게 그려지고, 이후 스탈린이 실각하고 사회주의가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북한이 ‘주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과정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세죽을 따라가면 시대의 비극과 운명이라는 괴물이 어떻게 한 여인을 덮쳤는지, 비애를 머금을 수밖에 없다. 고명자라는, 강경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인을 따라가면 안타까운 지도자 여운형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함께 남한 땅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이 과정을 전개하는 작가의 솜씨는 기교 이상의 것이다. 격동의 시기가 힘있게 펼쳐진다. 작가가 “픽션이라는 명목으로 역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시종 긴장했다”고 말한 것처럼 형용사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팩트 그 자체로 슬프고 웅장하다. 수많은 자료를 충분히 자신만의 것으로 해석하고 소화하지 않는 한 기술하기 힘든 인물과 대화의 생생함이 가독성을 돋운다. 유형지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을 호소한 옛 아내, 모스크바에서 동지와 재혼했던 주세죽에게 냉정한 박헌영과 허정숙이 나누는 대화는 작가의 생각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세 여자의 삶을 축으로 한반도 비극의 뿌리를 12년에 걸쳐 탐사한 소설가 조선희. 그는 “세 여자가 태어난 것이 20세기의 입구였는데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백 년 넘게 산 기분”이라고 썼다.
한겨레출판 제공
“나 같으면 사랑하는 아내가 의지가지없이 외로운 처지가 되었을 때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다면 고맙겠어요. 세죽이나 단야나 저들이 원해서 그런 인생을 산 거 아니잖아요.”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오.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개인의 이성과 판단을 넘어서 있소. 용서한다면 시대를 용서해야겠지.”

조선희는 청계천에서 ‘감히’ 단발을 하고 냇물에 발을 찰랑이는 ‘단발랑(斷髮娘)’ 세 여자의 사진에서 촉발된 이 소설을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직을 거치는 휴지기를 포함해 12년에 걸쳐 붙들고 씨름해왔다. 그는 “이 소설은 세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역사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면서 “해방공간에서 저질렀던 정치가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지금 사회의 갈등을 풀고 이해하는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쪽의 ‘태백산맥’을 연상케 하는 노작을 완성한 조선희는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면서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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