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고 분석한다. “김구, 김규식이 평양에서 가져온 공동성명은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들의 잠꼬대가 되고 말았다. 남북연석회의 스타일은 그럴싸했으나 결국 하나의 역사적 푸닥거리로 남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미 단독정부 차려놓고 느긋하니 민족해방자 코스프레하면서 통일정부를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을 챙겼다. 이승만은 총선에서 어떻게 뒤집기를 해서 정권을 잡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라 통일협상 어쩌고 하는 모양새 따위는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반, 청계천쯤으로 짐작되는 서울의 냇가에서 과감하게 단발을 한 세 여성이 놀고 있다. 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
이 과정을 전개하는 작가의 솜씨는 기교 이상의 것이다. 격동의 시기가 힘있게 펼쳐진다. 작가가 “픽션이라는 명목으로 역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시종 긴장했다”고 말한 것처럼 형용사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팩트 그 자체로 슬프고 웅장하다. 수많은 자료를 충분히 자신만의 것으로 해석하고 소화하지 않는 한 기술하기 힘든 인물과 대화의 생생함이 가독성을 돋운다. 유형지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을 호소한 옛 아내, 모스크바에서 동지와 재혼했던 주세죽에게 냉정한 박헌영과 허정숙이 나누는 대화는 작가의 생각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세 여자의 삶을 축으로 한반도 비극의 뿌리를 12년에 걸쳐 탐사한 소설가 조선희. 그는 “세 여자가 태어난 것이 20세기의 입구였는데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백 년 넘게 산 기분”이라고 썼다. 한겨레출판 제공 |
조선희는 청계천에서 ‘감히’ 단발을 하고 냇물에 발을 찰랑이는 ‘단발랑(斷髮娘)’ 세 여자의 사진에서 촉발된 이 소설을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직을 거치는 휴지기를 포함해 12년에 걸쳐 붙들고 씨름해왔다. 그는 “이 소설은 세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역사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면서 “해방공간에서 저질렀던 정치가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지금 사회의 갈등을 풀고 이해하는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쪽의 ‘태백산맥’을 연상케 하는 노작을 완성한 조선희는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면서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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