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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지구의 미래] 정부, 피해자 인정 ‘바늘구멍’… ‘희망고문’에 우는 사람들

갈 길 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완전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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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31 20:37:28      수정 : 2017-05-31 20:37:27
 
환경부가 ‘가습기살균제 노출 태아 피해 인정’을 발표(3월27일)하기 전날, 대구에 사는 권민정씨는 포항으로 가는 짐을 챙겼다.

황망하게 떠나보낸 셋째 동영이의 유해를 포항 앞바다에 뿌린 게 10년 전. 권씨는 이후로 한 번도 포항을 찾지 않았다. 원인도 모른 채 배 속에서부터 아팠고 태어나서도 120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 하늘로 떠난 아이를, 또다시 무력한 엄마의 모습으로 만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아 피해가 인정된다면, 이제야 비로소 ‘네가 이런 이유로 그렇게 아팠단다. 이제 엄마를 용서해주렴. 늦어서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튿날 정부의 발표에 권씨의 기대는 또 한번 무너졌다. 산모가 폐질환(폐섬유화) 1∼2단계 판정을 받은 경우에만 태아 피해를 인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현재 정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호소하는 수많은 증상 중 폐섬유화만 피해로 인정하고 있다. 그것도 전형적인 영상 소견을 보이고 진행과정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로 국한된다. 예컨대 급성으로 입원해 바로 숨졌다면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의심되더라도 인정받을 길이 없다.

이런 ‘바늘구멍 판정기준’에서 권씨는 4등급을 받았다.

정부 발표를 쉽게 이해하자면 ‘엄마를 거쳐 태아에게 피해가 간다는 전제에 따라 엄마가 이상이 없으니 태아도 피해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성에 관한 일반 상식과 거리가 있었다. 의약품이나 술에 임산부 경고문구가 붙는 이유는 제품 속 특정 성분이 모체가 아닌 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을 정부는 모른 체했다. “왜 나는 멀쩡한 건지… 차라리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더라면 또다시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에요.” 
‘청천벽력’ 판정서 권민정씨의 셋째 동영군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판정 조사 결과. 태아기에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돼 생후 120여일 만에 호흡 곤란으로 숨진 동영군은 폐섬유화를 입증할 자료가 충분치 않아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았다.

지난 2일 만난 권씨의 눈망울과 목소리에 울음이 스며 있었다. 권씨는 2004∼2007년 매달 한두 개의 가습기살균제를 썼다. 그 사이 권씨가 잃은 아이는 동영이뿐이 아니다.

2005년 둘째 임신 31주차에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아이의 장기가 하얗게 뒤덮여 보인다”고 했다. 병원에선 이 같은 사례를 국내에서 보지 못했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면 다른 의사들과 상의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결국 임신을 종결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듬해 동영이를 가졌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가습기를 틀었다.

동영이 역시 둘째와 비슷한 시기에 장기가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의사들은 유전병도 아니고 학계 보고 사례도 없어 질병명도 없다고 했다. 종합병원으로 옮겨 갖가지 검사를 받은 끝에 “일단 출산까지 가보자”는 판단이 나왔다.

동영이는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다행히 10여일 만에 호전돼 퇴원했다. 건조한 공기가 호흡기에 안 좋을까 싶어 24시간 가습기를 틀고, 열심히 살균제를 부었다.

아이의 숨소리는 자꾸만 나빠졌다. 생후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중환자실에 입원해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어른 손바닥만큼 작은 가슴이 힘겹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링거를 꽂을 자리가 없어 심장 옆을 째는 모습을 보며 권씨는 몇 번이나 실신했다.
유품이라곤… 약숟가락·마스크… 동영군이 태어나자 마자 사용한 속싸개와 약숟가락, 호흡기 마스크 등. 권씨는 “아이가 남기고 간 몇 안 되는 흔적을 차마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2007년 4월15일 아이의 숨이 멎었다. 생후 124일째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불거졌다. ‘내 손으로 부은 살균제가 원흉이었다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상황이 들어맞았다. 동영이를 보내고, 주변의 만류에도 다시 아이를 가진 권씨는 이사할 때 가습기가 고장나 일회용 페트병을 꽂아쓰는 가습기로 바꿨다. 청소가 필요 없는 제품이었다. 2008년 태어난 막내는 지금까지 건강하다.

지난 몇 년간 권씨는 살균제 참사를 알리는 기자회견과 국회토론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냈다.

살균제와의 악연은 두 아이를 잃은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첫째에게도 문제가 나타났다. 유아기에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첫째는 2015년 12월 검사에서 폐에 이상이 발견됐다. 현재 정부 피해가 인정되는 폐섬유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상도 아니여서 지금까지 방학 때마다 검사를 받고 있다.

권씨는 이제 지친다고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냈지만 이번이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될 거라고 했다.

“5∼6년을 떠들어도 안 되고 바뀌는 게 없잖아요.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동영이도 알아주지 않을까요”

◆“정부 잘못 인정하고 피해인정 범위 넓혀야”

정부의 피해자 인정 방식은 문제가 없을까.

조경현 영남대 교수(생명공학)는 지난해 권씨의 혈관경직도를 검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정상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혈관 노화가 나타났다.

조 교수는 “2006년 러시아에서 가습기살균제 성분인 PHMG가 첨가된 보드카가 유통되는 바람에 1만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하고 1000명 넘게 사망했는데 간, 위, 췌장 등 사람마다 이상 부위가 달랐다”며 “물질의 독성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상황에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피해자로 인정하겠다는 건 기업의 논리”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의 고통이 어떠하든 정부의 피해 인정비율은 급감 추세다. 정부는 2014년부터 지난 3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피해 조사·판정 결과를 발표했다. 2014년 1차 판정에서는 피해를 입었다고 신청한 361명 중 172명(47.6%)이 피해자로 인정됐지만 그 이후 30.2%, 21.2%, 10.1%로 감소했고 지난 3월에는 3.0%로 떨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현재 판정을 기다리는 4602명 중 대부분은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접근 방법과 관점에 있다.

현재 천식과 기관지염을 비롯해 생식독성, 간독성 등 폐섬유화 이외의 피해에 대해 정부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천식 등 섬유화 이외 폐질환은 6월 2일 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거쳐 7∼8월쯤 인정 여부와 기준이 발표될 예정이다. 생식·간 독성, 피부질환 등 폐 이외에서 나타나는 질환에 대해서는 연말에야 동물실험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천식이 인정되더라도 천식에 걸린 모든 가습기살균제 사용자가 피해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의학적 기준에 부합하고 진행경과를 확인할 수 있는 이들만 1·2단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문턱을 넘기 힘들다.

서흥원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과장은 “인정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 기업이 소송을 걸어 (피해자가) 패소할 경우 정부가 피해자 구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피해자 지원금은 정부 예산으로 잡힌 게 아니라 구상권으로 기업에서 회수하게 돼 있어 이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접근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는 “애초 정부가 계면활성 성분이 전혀 없는 가습기살균제를 ‘세척제’로 시중에 유통시킨 게 비극의 시작”이라며 “말하자면 비누(세척제)를 공기 중에 뿌려 코로 들이마시도록 해놓고 구상권 뒤에 숨어 정부 책임에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비난했다.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최예용 소장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기업에 대해 구속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도 현재 의학적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피해자 구제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가해자인 기업이 ‘가습기살균제로 해당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토록 하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질환에 대해서는 피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피해자가 확실한 피해를 입증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피해자 범위를 넓혀 정부가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고 지금처럼 까다로운 의학적 검증으로 확인된 피해자에게는 기업이 추가로 배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가습기살균제 재조사와 국가 책임 인정’을 약속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려진 게 없다. 두 시간 가까이 눈물을 쏟아내며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려준 권씨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가장 답답한 건요, 화가 나는데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정부가 우리 보고 ‘너네는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하잖아요. 화가 나도 화를 낼 수 없는… 분노할 권리마저 빼앗긴 기분. 그거 아세요?”

경산=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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