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MOON’에 비는 소원 지나치면 독

관련이슈 기자가 만난 세상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5-26 19:39:47 수정 : 2017-05-26 23:23:2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H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처럼 굴었었다. 지난해 말 술을 마시며 “새해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H였다. 학창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간 냉소적이긴 했다. 그런 H는 졸업 이후 극심한 실업난 속에서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지구멸망’을 바랄 정도로 불만이 높아졌고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최근 H가 달라졌다. 바라는 게 많아졌고 그것이 이루어질 거란 기대가 커졌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을 줄여주세요”, “청년 실업률을 낮춰주세요” 등의 소원을 담은 메시지를 인터넷에 띄운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다. 

“달님에게 소원을 빌면 이번만큼은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 같아.”

H는 문재인 대통령의 성 ‘문(Moon·달)’에서 따온 애칭을 말하며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다니… 문 대통령의 별명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달이 기원의 대상이 된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고 지금도 누군가는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밤 깊은 뒤뜰에서 기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정부가 바뀌고 ‘달님(문 대통령)’은 하늘의 ‘달’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문 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가득하다. H가 원하는 노동 문제 개선은 물론이고 ‘사회에 만연한 적폐를 청산해 달라’, ‘분열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의 대통령이 돼 달라’ 등 더 나은 사회를 기원한다. 한국인의 삶이 고단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염증이 높은 걸 반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바라는 것이 넘치다보니 이런 것들도 종종 눈에 띈다. ‘장례시설 건립 작업을 중단해 주세요’, ‘사형 집행을 다시 시작합시다’, ‘간통죄를 부활시켜 주세요’, ‘간호조무사 경력 5년 이상이면 정규직 간호사로 전환시켜 주세요’ 등은 이것저것 따져보아야 할 게 많고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나라에서 무슬림을 모두 추방하세요’, ‘지난 정권과 가까웠던 이들을 모두 감옥에 보내세요’ 등은 정치 보복을 하자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인종 혐오가 표현된 것이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높은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나만 좋자고 과거를 헤집어 분풀이를 하자는 소원은 독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내세운 ‘적폐청산’, ‘청년에게 힘이 되는 나라’ 등은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민들의 바람은 국가운영의 동력이 되겠지만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논어’의 ‘임사이구 호모이성’(臨事而懼 好謨而成·일을 대할 때 신중하고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 구절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가 요즘이 아닌가 싶다.

삶에 지칠수록 희망찬 내일을 바라며 소원을 빈다. 우리 사회는 지난겨울 혼란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소원은 더 많고 더 절실하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배신감으로 변한다. 달을 바라보고 소원을 빌 때도 마찬가지다.

달이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