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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인 이환의가 쓰는 농부 이반의 초록일기] 연대·협동, 위대한 농촌 유산 있으매… 삶터가 정겹다

관련이슈 귀농인 이환의가 쓰는 농부 이반의 초록일기

입력 : 2017-05-27 16:43:42 수정 : 2017-05-27 16: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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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혼자서 안되면, 조합으로 해결한다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고추를 심는 일꾼을 한 분 사려면 품삯으로 6만원을 드려야 한다. 지역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전국 어디든 밭일을 할 때 사람을 부르면 최소 5만원은 들 게다. 만일 세 사람을 산다면 18만원에 점심과 오전, 오후에 새참 두 번을 내오면 한 사람당 1만원가량 비용이 더 든다. 일꾼이 차가 없으면 모시러 가고 일이 끝나면 다시 집까지 태워다 드려야 한다.

우리 부부가 막 시골살이를 시작한 20년 전에는 2만원이어서 그런대로 사람을 부를 만했다. 하지만 3배가 오른 지금은 꼭 일꾼을 써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농가 소득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쌀값은 그때나 지금이나 요지부동인데 인건비는 몇 배가 오른 만큼 다른 농가도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밭작물도 쌀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갈수록 살기가 팍팍해지는 건 도시나 농촌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초창기 홍성의 귀농인들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 했다. 수요와 공급으로 상징되는 시장의 원리나 가격이 아닌 우리들만의 교환 가치를 정해서 운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손이 필요하면 되도록 품앗이로 해결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직접 품을 갚기 어려우면 다른 이를 보내되 돈은 마지막 지급 수단으로 정했다. 즉 하다 하다 안 되면 품삯으로 대신하지만 이마저도 지역의 시세보다 2만원가량 낮춰 부담을 덜도록 했다. 물론 이 기준은 사전에 합의한 농가끼리만 적용했다. 당시엔 따로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품앗이 조합 같은 모임이었다.

홍성 귀농인들의 종균 배양 품앗이 모습. 돈 대신 일손을 서로 주고받는다.
#홍성 귀농 오리엔테이션, 공동 퇴비작업


이렇게 몇 년간 운영하다 보니 빠듯한 살림에 부담도 덜하고 선후배 간에 교류나 협력도 활발해져 13년간 공동 퇴비작업을 지속하는 등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전례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귀농 후배가 오면 일 년에 두 번 사나흘간 보령의 친환경 자연닭장에서 포크와 삽으로 축사 밖으로 퍼내는 작업이 유서 깊은 홍성 귀농 오리엔테이션의 시작이었다. 냄새 나는 닭장에서 며칠간 격의 없이 어우러진 까닭에 서로 유대가 탄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번 상상해보시라. 마을에 새로 들어온 청년의 트럭 뒤로 늘어선 차량의 행렬을!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속으로 ‘저 사람 뒤에 저렇게나 많은 이들이 있었나?’라며 그이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만년 작업반장을 맡았던 내가 소를 키우면서 한 발 물러나는 바람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보령에서 홍동까지 오가는 길목에 늘어선 예닐곱 대의 닭똥 향기 가득한 트럭의 행렬을 떠올리면 그 진한 추억과 아쉬움 때문에 후배들이 다시금 부활시켰으면 하는 마음이다.

적정기술의 일환인 개량화덕 만들기. 참여자 일부가 적정기술협동조합을 결성했다.
#농사와 건축의 이중주, 얼렁뚝딱 생태건축조합의 탄생


홍동면 애향공원에서 학생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손님을 기다리던 귀농 후배 한 사람이 뜻밖에 자전거 수리공으로 변신했다. 이전에 그이는 집 주변 밭과 논 서너 배미를 일구는 농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몇 년 전에 쉽지 않은 결심을 하고 읍내의 자전거 대리점에서 한동안 자전거 수리를 익혔다.

많지 않은 농사채에 자전거 수리로도 부족했는지 5년 전에는 또 다른 삶의 기술을 익히려 홀연히 집을 떠나 건축현장에서 일 년을 보냈다. 그리고 얼치기 목수로 돌아와서는 두 가구가 어울려 짓는 생태 건축에서 배운 것들을 제대로 써먹었다. 그 뒤에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몇몇 귀농·귀촌인을 모아 아예 얼렁뚝딱이라는 집짓기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얼렁뚝딱은 개정된 협동조합법에 따른 군내 첫 조합이다. 아직까지는 짓는 것보다는 수리에 무게중심이 실리지만 평소에 농사와 생태 미술 등 자기 일을 하다가 요청이 있으면 즉시 팀을 꾸려 현장에 투입한다. 홍성뿐 아니라 멀지 않은 다른 시군까지 출장을 가기도 한다. 작년 이후로는 대안 건축을 꿈꾸는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과 소재로 삶터를 꾸미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얼렁뚝딱이 지은 집은 대부분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쓰지 않았다. 대신 긴 튜브 형태의 양파망에 석회와 흙을 섞어 채우는 흙 부대와 볏짚을 사각으로 묶은 스트로 베일을 주로 쓴다. 여기에 석회와 나무를 더하는 등 몇 가지를 결합시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짓는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초도 콘크리트가 아닌 흙이 대신하고 건축의 전 과정에 집 주인이 참여하는 새로운 시도는 예전에 시골에서 농부들이 집을 짓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에는 집 주인이 나무와 돌 등 기본 재료를 준비하고 대목의 안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자귀질을 하고 외를 엮은 뒤 안팎으로 흙을 발라 집 한 채를 뚝딱 지었다. 옛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고자 협동조합 이름도 함께 어울려서 얼렁, 경쾌한 망치질 소리의 운율을 살리고 모이면 금세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다고 해서 뚝딱이다.

의료생협인 우리동네의원 건물 전경.
#협동조합의 중심엔 어김없이 귀농·귀촌인이 있다


얼렁뚝딱 외에도 홍성에는 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풀무학교 생협과 신재생에너지의 활용을 중심으로 대안 기술을 보급하는 적정기술협동조합, 우리 마을 의료생협, 자연재배협동조합 등 지역의 관심사와 현안을 두루 반영한 협동조합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는 SNS와 영상물 제작을 주업으로 하는 귀촌인 중심의 미디어협동조합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전직 인터넷 강사와 팟캐스트 운영자, 지역신문 기자 등이 주축이 되어 조합을 결성하고 출범한 지 수개월 만에 매출이 1억원을 넘겼다고 한다.

나도 올해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이자 은퇴 후 네게브사막의 농부로 변신한 이를 기려 ‘벤구리온 2017’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었다. 요사이 급증한 귀촌인들이 시골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 해 동안 농촌의 틈새시장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수년간 비슷한 고민을 해왔지만 농사와 체험, 교육을 병행하느라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틈새를 찾아 기존과 차별화한 콘셉트로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결과를 지역 내 귀농·귀촌인들과 공유하려 한다.

예를 들어 농촌체험 분야에서 대형 버스를 기반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겉핥기식 투어 대신 승합차로 이동하는 주제가 있는 체험을 기획 중이다. 명소 중심의 간략한 설명이나 안내가 아니라 홍성의 유기농업 현장이나 협동조합 탐방 등 10명 안팎의 소수를 대상으로 견학과 교육, 체험에 맛집을 결합한 내용과 깊이가 다른 여행이다. 전자가 눈이 즐거운 여정이라면 후자는 뇌가 즐거운 기행이 되지 않을까 한다. 작년에 귀촌 가구가 32만을 넘겼다는데 정작 귀촌인의 정착을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이나 사업 아이템은 턱없이 부족하기 짝이 없어 오래도록 고민한 결과다. 홍성군에서 공모하는 생생 아이디어 본선에도 진출했다.

개인적으로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거 은퇴하는 현 시점이 다시금 농촌 르네상스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 본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농업과 농촌의 어려움을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분들이 다시금 농촌에 눈길을 두는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미덥다. 하지만 정작 시골로 삶터를 옮긴 귀촌인들이 수년간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종종 봐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도 귀농에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어 귀촌인들의 소외감이 크다. 그럼에도 홍성 귀농·귀촌인들의 도전과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역사 이래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꿋꿋이 버텨온 이면에는 오로지 농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내밀한 자산 때문이라고 본다. 도시에서는 돈이 모든 거래와 소통의 가늠자지만, 그간 후배들에게 돈은 최후의 지급 수단이라 했고 이를 실천했으며 앞으로도 똑같이 힘주어 말하고 싶다. 우리에겐 돈은 없지만 연대와 협동이라는 농촌의 위대한 유산이 남아 있기에…. 호미와 망치 등 상징물이 잘 드러난다.

이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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