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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축복과 저주’ 갈림길에 다시 선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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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08 21:14:33 수정 : 2017-05-08 21: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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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면
당파싸움 벌였던 조선시대 같아
국민국가 못되니 강대국이 얕봐
모두 ‘주권적 개인’으로 거듭나야
서구가 주도한 근대가 인류에게 선물한 것은 과학과 기독교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을 이용하는 도구적 기술이고, 과학사회에 따르는 인간의 삶을 다스리기 위해 기독교는 재해석돼야 했고, 그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였다. 기독교윤리는 근대사회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기독교윤리 이외에도 인류는 근대정신을 계몽하는 철학을 필요로 했고, 이에 부응한 철학이 바로 칸트의 도덕철학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흔히 근대적 진선미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과학의 세계를 어떻게 인간의 인식이 달성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에 치중했고, 이를 위해 인간 인식의 한계설정을 통해 신과 사물 자체를 인식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것이 바로 물리적 현상학(뉴턴물리학)을 뒤따라간 칸트의 철학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서구의 근대문명은 중세의 기독교라는 틀을 벗어났긴 했지만 여전히 기독교라는 접두어로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자유민주주의(자유자본주의)와 이것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기독교마르크시즘(공산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천동설을 극복하고 지동설의 과학세계를 열었지만 기독교 실체론의 전통을 계승한 기독교과학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자유와 평등, 주인과 노예라는 극단적 이중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종교로서 역사상 항상 모순을 연출했고, 그리스비잔틴정교(正敎)계통 지역이 공산권이 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구자유자본주의와 동구공산사회주의의 체제경쟁은 구소련이 해체됨으로써 자유와 평등 중 자유가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더 맞는 것임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필자가 보기에는 자유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등이라는 동일성을 강제한 사회주의를 이겼다고 여겨진다. 서구문명은 오늘날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고, 근본적으로는 인류에게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절대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문명이지만 그래도 자유라는 사상 때문에 오늘의 인류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평등은 처음부터 정치적 통제와 계획경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고, 이러한 집단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구속하게 돼있고, 사회적 생산량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는 물심양면에서 삶의 하향평준화로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과 북한도 공산당의 권력만 남아 있다.

한민족은 태평양전쟁의 결과로서 타의에 의해 해방됐지만, 남북한이 분단되는 것과 함께 삶의 방식에서도 공산사회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한민족이 직면한 시대적 과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느 체제가 단순히 우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느 체제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미래 인류문명에 쉽게 적응하고, 문화능력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유리하느냐의 문제이다. 탁상공론과 당파싸움을 야기하는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의 늪(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의 남북한의 모습을 보면 성리학적 이단논쟁과 당파싸움, 예학논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조선조의 선비들이 생각난다.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닮았는지, 당파의 유전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손에 의해 해방된 한민족은 겉모양은 국가를 이룬 것 같지만 아직 근대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북한의 ‘국민 없는 국가’와 남한의 ‘국가 없는 국민’이다. 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이 한민족의 현실이다.

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하니 주변강대국들은 얕보고 우리 땅에서 자국의 이익을 경쟁하게 된다. 특히 동북공정으로 만주와 북한 땅의 영토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경계대상이며, 북한의 핵 주권을 피곤하게 생각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민족은 지금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있다.

근대서구문명의 장점인 과학과 민주주의와 시장경계를 잘 소화하고, 어느 것이 한국문화의 확대재생산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창조적으로 열어갈 수 없다. 좌파든 우파든 종북세력에 끌려다녀서는 역사적 역행을 면할 수 없다. 국민각자의 선택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서구문명과 철학은 오늘날 매우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의 문화문법으로 보면 결국 세계를 긍정하고 축복할 것이냐, 세계를 부정하거나 질투하고 저주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저주의 굿판’에 빠져 있다. 한민족에게 권하고 싶다. 마르크스를 배우기보다는 니체를 배우라고―. 마르크스는 노예의 철학인 반면 니체는 주인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서구문명이 근대에 탄생시킨 예수의 두 변종이다. 마르크스가 흑주술(黑呪術)의 샤먼이라면, 니체는 백주술(白呪術)의 샤먼이다. 일제식민지의 압박과 설움에 시달린 한국인은 ‘원한과 분노’라는 노예의 흑주술에 빠지기 쉽지만 ‘주권적 개인’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선진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국가가 없으면 어떤 민주주의도 설 자리가 없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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