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정조 4년, 1780년 사행단을 따라 청에 간 연암 박지원. 심양 가는 길에 만주족 서생 부도삼격(富圖三格)을 만났다. 그에게서 빌린 책에 담긴 서적 목록 70여개를 옮겨 적었다. 그때 필사한 목록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왜 옮겨 적은 걸까. “이런 책도 있다”는 것을 조선에 알리려 했을까. 책에 대한 조선 선비의 열정은 대단했다.

훈민정음 창제 직전, 세종대왕은 ‘원육전’을 이두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원육전은 경제육전의 다른 이름이다. 한문을 모르는 아전들로 하여금 법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조판서 허조 왈, “간악한 무리가 율문(律文)을 알면 법을 농간하지 않겠사옵니까.” 세종은 답했다.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더냐.”

이두 원육전은 널리 읽혔을까. 그렇지 못했다. 왜? 인쇄술이 모자랐으니. 이때로부터 약 300년 뒤에 쓴 열하일기도 필사해 봐야 하지 않았던가. 부족한 인쇄술. 개혁적인 생각도 고승의 산중담론처럼 변하고 만다.

서구는 달랐다. 1400년대 중반 성서를 금속활자로 찍어 냈다. 1795년 영국에서는 금속인쇄기가 나온다. 그 결과는? 책이 대량 유통되고, 집단의 지성은 높아진다. “산업혁명은 책의 대중화에서 비롯됐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서구 민주정치의 씨앗도 책의 대중화인 것은 아닐까. 지식이 대량 유통되는 사회, 책을 보고 싶어도 보기 힘든 사회. 어느 곳이 이길까.

“종이책은 사라진다.” 전자책(e-북)이 등장한 후 요란한 구호다. 과연 그럴까. 통계 하나가 나왔다. 지난해 영국 책시장, 전자책 판매는 17% 줄고 종이책 판매는 7% 늘었다. 미국 책시장도 똑같다. 시대를 역행하는 흐름일까.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난 걸까. 문향(文香)을 음미하는 종이책과 TV 자막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전자책의 차이 때문일까, 주문하자마자 책을 배달해 주는 초고속 택배 때문일까. 종이책 사망 선고는 아무래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주도할 책은 어떤 형태일까. 혹시 지식과 경험을 뇌에 자동 저장하는 ‘AI-북’이 등장하지 않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