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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미주 독립운동 거점 강영소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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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8 00:08:31 수정 : 2017-04-28 0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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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 시카코에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강영소와 강영문, 강영상 형제가 운영하였던 큰 음식점이 있었다. 1924년 개업한 로렌스 카페테리아와 1926년 시작한 디버시 카페테리아가 그곳이다. 음식점 운영으로 생긴 이익금 대부분은 독립운동자금으로 기탁됐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아버지 강명화(1868~1933) 선생의 애국정신에서부터 시작됐다. 평남 증산에서 태어난 강 선생은 평양에서 인삼상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5월 당시 36세에 장남 영대(21)와 둘째 영소(20), 넷째 영상(15), 막내 영각(8)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지 반년도 채 안 돼 미국 본토로 옮겨갔다. 둘째 영소만 하와이에 남고 아들 셋은 아버지와 함께 본토로 이주했다.

그는 미국에서 인삼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민온 지 6년 만이자 미국에서 독립단체인 국민회가 결성된 지 2년 만인 1911년 11월22일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총회장에 올랐다. 그 후 20여년간 시베리아, 만주, 멕시코까지 다니며 지방총회를 만들었다. 맏형 영대와 둘째 영소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다. 대한인국민회의 2개 주춧돌인 공립협회 대표 6인과 합성협회의 대표 7인에 각각 영대와 영소의 이름이 올라 있다.

독립운동가 강영소(작은사진)와 강영문, 강영상 형제가 운영하던 시카고 로렌스 카페테리아가 있던 자리.
독립기념관 제공
특히 영소는 도산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미주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로 불렸다. 도산과 함께 흥사단도 창단했다. 1913년 5월 흥사단이 창립된 장소가 바로 영소의 집이었다. 한국에 남았던 셋째 영문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민을 떠난 지 9년 만인 1914년 3월29일 혼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20년 캘리포니아 월로스에서 시작한 한인비행사양성소에 참가해 서기로 활동했다. 영문은 1923년에 형제 중 가장 먼저 시카고로 이주해 훗날 형제들의 보금자리가 될 식당을 마련했다. 넷째 영상도 이듬해 시카고로 옮겨가 음식점에 합류했다. 둘째 영소와 셋째 영문이 회계와 물품구입을 맡았고, 넷째 영상이 주방 요리사였다.

막내 강영각이 1997년 가족 중 가장 먼저 독립운동에 공헌한 공로로 포상(건국포장)을 받았다. 2011년 둘째 강영소(독립장), 2012년 아버지 강명화와 넷째 강영문이 애족장을, 2013년 장남 강영대와 넷째 강영상은 각각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처럼 한 가족 6명의 서훈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만3930명 가운데 유일하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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