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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11)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이념의 상처

관련이슈 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 디지털기획

입력 : 2017-04-26 16:47:42 수정 : 2017-04-26 16: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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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

작가 박완서가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개성 인근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곡절 많은 현대사를 사람들이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짐작할 만한 묘사가 많다. 작가 특유의 감수성을 담은 흡인력 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그는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로 가는 길에 개성에 들러 도시 정경을 처음 보게 된다.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일제 말기에 고향에 갔을 때는 상황이 극도로 악화됐다. 남자는 징용으로, 여자는 정신대로 끌려갔고 얼마 안 남은 식량마저 수탈당했다. “사람을 빼앗기는 건 먹을 걸 빼앗기는 것보다 더 무서웠고 사람과 먹을 걸 한꺼번에 빼앗기는 세상은 보나마나 말세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해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서 느닷없이 미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주둔을 했다. … 삼팔선이란 추상적인 선이 현실적으로 어떤 구속력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세상이 정치적 구호와 시위에 휩쓸리자 학교에도 그 파장이 미쳤다. “실상 그때 우리가 날뛴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문제일수도, 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은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새롭게 전개될 생활에 대한 예감에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 1950년의 5월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지만 실감하진 못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 38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그러다 피난할 기회를 놓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서울이 수복된다.

“살아남은 자는 제각기 구사일생이나 간발의 차이를 안 거친 이가 없었으니, 천명이 아닌 이 또한 없었다. 누구나 한번 사선을 넘고 나면 담대해지고 뭔가 보람 있는 일에 몸바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복수의 정열이 그들을 살기충천하게 했다. 게다가 아직도 전쟁 중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돼 있는 전쟁을 동족끼리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敵)은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그냥 공산당이었다.”

그와 가족들은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당시 경험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여러 군데서 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

또 다시 서울에서 피난해야 할 때 한강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처음 서울살이 하던 인왕산 자락 현저동 산동네로 들어갔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그는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박완서가 이 소설을 처음 낸 게 1992년이다. “내가 박수 치고 역성들어 줘야 할 편은 좌익이란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 같은 민감한 내용이 들어있다. 앞서 그는 1989년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고향마을 방문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내가 오래 참고 기다리고 갈망한 것은 알 권리 이전의 느낄 자유였다. … 도대체 이데올로기라는 게 뭐관데 이런 평범한 인지상정, 알 권리 이전의 느낄 자유까지 죄목으로 다스리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라고 개탄했다. 이에 비추어 작가는 탈냉전 시대가 열려 이념 갈등이 완화되자 이 소설을 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념에서 자유로운가. 5·9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 간 이념 공방이 끊이지 않는다. 색깔론이란 구시대적인 말도 공공연히 사용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념에 관한 말을 별 생각없이 너무 쉽게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현대사에 남아 있는 상처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말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념 공방이 대선 판도를 흔들지 못한다. 이념으로 편가르기 하는 일에 신중을 기할 때가 됐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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