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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이것만은 확 바꾸자!] "날 때부터 학벌·직업 정해져 있다"… 끊어진 '기회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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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5 19:28:24 수정 : 2017-04-26 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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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의 용’ 막는 사교육 양극화… 부모 소득이 자녀 학벌 가른다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에 전세를 살고 있는 A(37·여)씨는 되도록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 이웃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드는 위화감과 ‘이렇게 극성을 부려야 내 아이가 중간이라도 가겠구나’라는 압박감이 싫어서다. 그들처럼 이제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독서·영어교실, 요리·미술 융합 활동, 수학·과학 교구 놀이, 레고방, 숲 체험교실, 수영, 축구 등을 두루 가르칠 능력도, 열의도 없다. 어린이집 학부모들이 ‘저 애는 좀 떨어지네’라고 뒷담화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지난해 말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를 다녀오고 난 뒤 이사 결심을 굳혔다. 아이가 어린이집 특별활동 시간에 배운 영어를 곧잘 따라하는 데다 ‘영어는 일찍 가르칠수록 좋다’는 주변 말에 솔깃해 찾아간 자리였다. 한 달에 150만원(교재비 포함)가량 드는 교육비는 그나마 다른 씀씀이를 줄이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설명회장에서 꼼꼼하게 필기하던 엄마들이 유치원 측에 영어로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A씨는 “지금까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발버둥을 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학벌·일자리까지 결정”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교육이 계층 이동을 위한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학벌주의 사회에서 일자리 질을 결정하는 대학 간판은 개인의 역량이나 노력보다는 사교육비 같은 부모의 지원에 더 좌우된다고 믿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가속화한 사회 격차(경제적 불평등)가 사교육비 차이에 따른 교육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어 교육 양극화는 다시 사회격차를 공고히 하면서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가 대물림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개천에서 용 나는 교육 희망사다리 구축’이라는 한 대선후보 교육공약 슬로건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수저 계급론’에 대한 방증이나 다름없다.

교육이 ‘계층 대물림’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최근 국회예산정책처의 ‘저출산 문제와 교육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사교육비 지출 규모에 따라 주요 대학 진학률은 큰 차이를 보였다. 2002년 사교육비를 가장 많이 쓴 그룹(월 평균 61만1000원)의 주요 10개 대학(서울대·연세대·고려대·카이스트·포스텍·성균관대·경희대·서강대·한양대·이화여대) 진학률은 26.0%다. 사교육비를 두 번째로 적게 쓴 그룹(월 10만3000원)의 진학률(6.0%)보다 4배 이상 높았다. <세계일보 2월27일 1·10면 참조>

서울 부자 동네의 서울대 합격자 비율은 갈수록 는다.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 일반고 출신 중 2017학년도 서울대 합격자는 254명이다. 일반고 전체(576명) 합격자의 44.1%를 차지한다. 입시업체 종로학원하늘교육 분석에 따르면 2007학년도 강남3구 거주 학생의 서울대 합격자 비율은 전체의 38.9%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부자 동네에만 살고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사교육비 차이가 ‘주범’으로 지목된다. 교육부·통계청의 ‘사교육비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사교육비 격차는 8.8배까지 벌어졌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자식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얘기다. 국민도 교육의 ‘수저 계급론’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통계청의 3년 주기 사회조사에서 ‘세대 간 이동 가능성이 매우/비교적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2006년 29.0%에서 2015년 50.5%까지 늘었다.

교육 양극화 문제를 천착해온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기초교육학부)는 “세대 간 계층 대물림이 심화하면서 교육의 사다리 역할에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며 “교육 격차는 공정성·형평성 논란에 따른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인재의 적재적소 활용 등 경제성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교육 격차 완화를 위한 최적기는 유아단계


‘유아 사교육 양극화’도 심각한 문제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8∼10월 전국 만 2세와 5세 부모 1241명을 대상으로 영유아 사교육 실태조사를 한 결과 2세아의 경우 35.5%가, 5세아는 83.6%가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월평균 수입이 481만원 이상인 2세 부모는 자녀 사교육비로 한달 평균 16만3800원을 쓴 반면 265만원 미만 부모는 11만원에 그쳤다. 초등학교 취학을 목전에 둔 만 5세 때 고소득가구는 자녀 사교육비로 월 19만3000원을, 저소득 가구는 14만200원을 투자했다.

이들은 왜 월 소득의 3.3∼6.9%를 자녀 사교육에 쏟아부을까. 자녀를 주로 월 학원비만 100만∼150만원인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고소득 가구의 경우 꼼꼼한 관리, 아이의 흥미를 끄는 환경,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비용 등을 꼽았다. 하지만 연구진과의 심층면담에서는 “내 아이가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답변이 많았다고 김은영 연구위원은 귀띔했다.

유아기부터 대입에 이르기까지의 교육 격차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의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는 유아단계에서부터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희삼 교수는 생후 22∼118개월 유아의 천부적 인지능력도 양육환경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내용의 2003년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영국 연구진이 1970년생 영국 아동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두 돌 무렵 인지능력이 상위 10% 수준이던 ‘흙수저’ 출신 아이는 생후 42개월까지 인지능력이 급속도로 하락해 결국 78개월 즈음에는 인지능력이 하위 10% 수준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에게도 추월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으로 보자면 유아교육 단계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최적기이기도 하다. 제임스 헤크먼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유아단계가 인적자원의 투자수익률이 가장 높은 단계라고 단언한다. 저소득층 대학생 등록금 지원이 1(투자)대 1(효과)의 정책효과를 낸다면 초중등 단계 빈곤층 지원은 1대 3, 유아 단계에서는 1대 8의 정책 효과를 낸다는 주장이다.

헤크먼 교수는 “저소득층 유아에게 집중 투자한다면 이들의 소득 증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빈곤율 감소와 범죄 예방 측면에서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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