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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문제는 주적이 아니야" 대선서 사라진 진짜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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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2 11:00:00 수정 : 2017-04-22 11: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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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던 냉전 시대의 유산이 조기 대선을 맞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주적(主敵). ‘싸워야할 주된 적’을 의미하는 군사용어인 이 단어는 2000년대 남북 화해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2004년부터 우리나라의 국방정책을 대표하는 자료인 국방백서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후 군 내부에서도 ‘주적’이라는 단어 대신 ‘적’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면서 주적 개념은 희미해졌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우리측 병사 뒤로 디지털카메라를 든 북한군 병사가 내부 촬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일 5당 대선 후보 2차 TV 토론회에서 후보의 안보와 대북관을 놓고 공방이 벌어지면서 주적 개념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고 묻자 문 후보는 “강요하지 마라. 유 후보도 대통령이 되면 남북 간 문제를 풀어가야 될 입장이다. 필요할 때는 남북정상회담도 필요하다. 국방부가 할 일이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고 답했다. 이에 유 후보는 “정부 공식 문서(국방백서)에 북한이 주적이라고 나오는데 국군통수권자가 주적이라고 말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이에 문 후보는 “내 생각은 그러하다. 대통령이 될 사람이 할 발언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두 번째 대선 TV토론에 앞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국민의당 안철수(왼쪽부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때아닌 주적 논란…대선 레이스 ‘밀어내기’ 전략

TV토론 직후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20일 문 후보의 안보관에 대해 공세에 나섰다. 문 후보 측은 국방백서에 주적 개념이 삭제돼 있다는 점을 들며 반박에 나섰다.

안 후보는 이날 오전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지금 남북대치 국면 아니겠느냐. 문 후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 후보는 이날 경기 평택 해군 2함대를 방문해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국군통수권을 쥐는 게 맞는지 국민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라며 “그런 분이 집권해서 국군통수권자가 되면 남북관계가 어찌 될지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후보도 이날 전북 전주 유세현장에서 “문 후보가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말했다”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문 후보는 이날 강원 춘천 일정 도중 기자들과 만나 “북한을 국방백서에서 주적으로 규정한 것은 과거의 일로, 남북관계 개선 이후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고 반박했다.

21일에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11월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시 정부가 기권한 것을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졌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문 후보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기권 결정을 내릴 때 국가정보원을 통해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자는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지만 문 후보는 북한에 직접 물어보자는 게 아니라 국정원의 해외정보망을 통해 북한의 반응을 판단해봤다는 것이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이에 송 전 장관은 이날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북한으로부터 연락받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며 문건을 공개했다.

비문(비문재인) 후보들은 “문 후보의 불안한 안보관이 드러난 것은 물론 거짓해명까지 밝혀졌다”며 공세를 가했다. 이에 문 후보측은 “지난 대선 때 북방한계선(NLL)과 같은 북풍공작으로 선거를 좌우하려는 색깔론”이라고 반박했다.

대선후보들이 주적, 북한인권결의안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것은 매우 짧은 선거기간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대선은 3개월 정도 걸리지만 이번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선으로 선거운동기간이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선거 기간 악재를 만날 경우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각 캠프는 상대 후보의 리스크를 높이고 자신의 후보는 불리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선거전략을 펼친다. 주적과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도 이같은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비문 진영이 표심(票心)을 잡기 위해서는 보수, 중도층 유권자들이 안보 문제를 놓고 문 후보를 바라보는 시각을 건드릴 필요가 있다. 이에 맞서 문 후보 측은 비문 진영의 ‘안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색깔론’으로 맞받아치며 국면전환을 시도하는 모양새다. 다음달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 진영의 안보 문제 공방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아 유권자들의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가의 집 울타리에 부착된 대선후보자 15명의 선거벽보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약 10m 길이의 선거벽보는 22일까지 전국 8만7600여 곳에 설치된다. 하상윤 기자
◆ 안보는 사라지고 정치만 남았다

주적 개념과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등을 놓고 각 후보 캠프별로 공방전이 지속되고 있지만 대통령 재임기간 5년간의 안보정책에 대한 밑그림과 군통수권자로서의 국방전략 등은 정치권에서조차 묻혀버리는 분위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는 후보들이 제출한 10대 공약이 올라와 있다. 각 후보들 모두 자신들이 대통령이 되면 시행할 외교, 안보, 통일 정책들을 소개하며 ‘나라를 지킬 준비가 된 대통령’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후보들이 내건 공약(公約) 가운데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적지 않다. 정부가 여러 차례 부정적인 입장을 표시한 원자력잠수함 전력화 추진과 전술핵무기 재배치 문제와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장병 급여 대폭 인상 등은 실제로 진행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북한이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강행한 핵실험 직후 군 당국이 천명한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와 킬 체인 조기 구축, 국방과학기술 진흥, 군과 사회와의 연계 강화를 위한 부모-부대간 소통활성화 등 국방부가 추진중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경우도 있다. 선거철마다 빠지지 않는 군 복무기간 단축도 포함됐다. 국방 증진 방법을 첨단 무기 도입에 한정한 것도 한계다.

더 큰 문제는 대선 기간 동안 후보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유권자들이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문민 정치권력과 전문가 집단인 군은 사냥꾼과 사냥개의 관계다. 사냥개는 사냥꾼이 이끄는 길을 따라 사냥감을 찾고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사냥꾼을 보호한다. 눈앞에 사냥감이나 위협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으르렁거리며 짖어 사냥꾼의 주의를 환기한다. 하지만 상대를 무는 행동은 사냥꾼의 명령에만 진행한다.

2014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림팩훈련에 참가한 우리 해군 장병이 태극기 앞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미 해군
군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군은 국민들이 선출한 문민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아 국가방위 임무를 수행한다. 군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취지지만, 문민 정치권력이 국방에 대해 명확한 비전과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국방 업무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각군 본부가 처리한다. 하지만 돌발적인 상황이나 국가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 북한 도발에 대항해 재개한 대북 심리전 등은 군 당국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청와대 차원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결단이 없었다면 군은 적을 앞에 두고 “쏠까요? 말까요?”라고 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군통수권자로서 국방에 대한 명쾌한 비전과 전략을 사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북한 도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참모들은 말 그대로 군통수권자에게 조언만 할 뿐, 정치적 결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결단은 대통령의 몫이다.

일각에서는 군에 위임을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일본의 경우 1877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뤘지만 군부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 장치가 미약했다. 이에 따라 국방정책은 사실상 군부가 주도했다. 견제와 통제가 없는 군의 행보는 1930년대 민간 정치인이 이끄는 내각과 의회를 해산시키고 1941년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1945년 8월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서 군 스스로는 물론 일본 제국의 종말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같은 점을 잘 아는 우리 군은 정부의 명령에 철저히 따르는 문민통제 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군인들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이라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지시나 결제가 있어야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8일 전주 전북대학교 앞에서 열리 한 후보의 유세에서 시민들이 연설하는 후보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원 기자
국민들은 향후 5년 동안 국가를 이끌기 위해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안보 분야에서 얼마나 준비된 후보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19일 TV 토론에서는 냉전의 유산인 주적 개념을 놓고 입씨름만 되풀이했다. 북한인권결의안 논란을 두고도 공방전이 지속됐다. 이같은 논란은 국방정책의 검증이나 안보 역량 증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안보를 이용한 정치 공방일 뿐이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수도이전이나 2007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등 대형 공약을 통한 어젠다 확보 시도가 없는 상황에서 안보 문제역시 네거티브만 난무할 뿐, 외교안보정책의 검증이나 비전 제시 시도는 눈에 잘 띠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북 압박이 지속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은 각각 사드와 소녀상 문제로 우리 정부와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국내외 환경이 엄중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 안보정책 비전을 얼마나 갖췄는지를 검증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남은 TV 토론의 의미가 작지 않은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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