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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살아도 산이 그립다] (8) 거기 정글이라구

입력 : 2017-04-19 21:17:03 수정 : 2017-04-21 14: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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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경의 마르디 히말 트레킹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진 모든 것이며 우리 이전에 일어난 모든 것이고 우리 눈앞에 벌어진 모든 것,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 우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사람이자 물건이거나 역으로 그것에 우리 존재가 영향을 준 것으로 우리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야스민 삼데렐리 감독의 영화 <나의가족 나의 도시; Almanya-Welcome to Germany> 가운데서)

<<사진 = 간드룩에서 보이는 마차푸차레와 마르디 히말>>

비레탄티에서 탄 버스는 김체가 종착지였다. 결국 마르디 히말 트레일을 걷기로 확정했고, 간드룩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한 이들이라면 포카라에서 칸데까지 가서 바로 피탐 데우랄리로 올라 마르디 히말 트레일을 밟는 게 좋을 테다.

버스에서 내려 공사 중인 먼지 풀풀 나는 새 길을 벗어나 옛길인 돌길을 1시간 쯤 걷자 저기 간드룩으로 들어가는 환영문이 맞는다. 안나푸르나 산군 속에 깃든 마을들이 거개 그렇듯 간드룩도 계단에서 시작하고, 그 끝 솟은 언덕에 툭 불거지듯 로지가 꽤 많은 큰 마을이 앉았다. 무수한 돌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오르는 길로 야스민 삼데렐리 감독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깔리고 있었다.

간드룩 이르기 얼마쯤 전 네팔리 부부 두 쌍을 만났다. 카트만두의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남자와 그들의 아내였다.

“ABC 가시나?” 

ABC 트레킹에서도 이 마을을 오거나 가니까.

“아니요, 여기서 자고 내일 내려가요.”

네팔에선 한국에서 일하다 왔거나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말 몇 마디 구사하는 이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유럽 사람이거나 미국인인 줄 알았어요.”

아무렴 외모가 그럴까. 영어 억양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한국인이라고 하자 당장 한국어로 몇 마디를 건넸다.

“제 아내는 구룽족이고 저는 체트리족이에요. 처가에 가면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어서 제 아내가 통역을 해요.”

언어가 스물이 넘고 방언이 백이 넘는 네팔이다. 네팔어가 공용어라지만 전체의 절반이 채 못 되는 사람들만 공유한단다. 따망족은 네팔 전체 인구의 3% 정도에 불과하지만 영국이며에 용병으로 이름이 높다. 구룽족의 민담 ‘죽음은 왜 보이지 않는가’를 읽은 적이 있다 하니 반가워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다.

“한 노인이 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려던 순간 ‘죽음’을 만났는데...”

그때 로지의 주인이 차를 내왔다. 다른 부부는 호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주라면 네 살 아이랑 일 년을 머문 적이 있다. 호주에 대해 묻고 답하던 다담은 한국의 탄핵상황에 이르렀다.(한국은 헌재의 대통령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던 때) 한국의 정치 상황을 다소 부끄러워하며 그 전말을 전하자 그는 네팔 또한 안고 있는 여러 정치 문제와 사람들의 저항에 대해 들려주었다. 위로라면 위로이겠다.

정치에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정치로부터 결코 무관할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뜻을 표출해야 하고 주장해야한다는 데 서로 동의하며 일어섰다.

그들은 네팔인 친구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돌기로 했단다.

“가이드가 제 친구예요.”

“원래 아는 친구?”

“아니. 오는 길에 만나 친구가 됐죠. 네팔에선 몇 살 차이가 나도 다 친구예요.”

저녁을 먹기 전 그 가이드는 마을을 구석구석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구릉족 전통박물관에도 들었다. 우리 옛적 살림이 엿보여, 외모도 한국인과 비슷하단다, 즐거웠다. 네팔인과 같은 비용으로 입장하고, 방도 그렇게 구하였네.

<<사진 = 구룽족 전통박물관에도 들었다.>>

 

 

 

티베트 곰파(절). 나라를 잃고 떠나온 티베트인들에게 곰파는 큰 구심점이 되어준다.

 

해가 지는 마을에서 티벳 곰파(절)도 기웃거렸다. 어김없이 들머리에서 마니차가 맞았다. 문이 닫혀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우리 학교에서 수행 시간에 쓰고 있는 띵샤며 싱잉볼도 그곳에 놓여있을 것이다. 나라를 잃고 떠나온 티벳인들에게 곰파는 큰 구심점이 되어준다. 우리 역시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꾸리는 살림이지만 티벳독립을 지지하며 작은 후원을 하고 있는 물꼬이다.

‘1시간이면 모든 집의 마당을 다 서성거릴 수 있겠는 산마을, 로지로 돌아오기 전 저녁이 내리는 집 하나를 오래 보았다. 집 앞 난간에 깡통이며 들통을 잘라 만든 화분에 꽃들을 심어 늘여놓았다. 저녁 빛이 꽃 위에 나비처럼 앉은 풍경이 잔잔함을 부르다가 허허로움으로 흩어졌다가는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멀리 있으나 나는 계속 살고 있다...’


<<사진 = 간드룩의 로지 ‘사쿠라’, 마을에는 딱 한 그루의 벚꽃이 있었다. 파이며 직접 굽는 유일한 빵집이어 마을에서 머무는 여행객들이 이곳으로 조각 케익을 사러온다.>>

로지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땐 일본 유학 4년차 젊은 네팔 청년 둘도 함께했다. 그들도 오늘밤만 묵고 포카라로 내려간다 한다. 푼힐도 가보고 싶지만 한 청년의 누이 결혼식이 있다고. 여느 때라면 외국인이 더 많았을 법. 최근 2년 정말 자국민들의 여행이 늘었고, 오늘만 해도 식당에 같이 모여 앉은 이들이 전부 네팔리들이다. 

2014년 ABC 일정은 몇 사람의 산꾼들 틈에 끼여 걸었더랬다. 안정적이었으나 명랑한 낯선 관계 속의 즐거움은 또 아쉬웠던. 일행들이 있었으니 로지에서 대부분 그들과 보내느라 정작 낯선 이들과 함께 모여 여담을 나누는 일이 흔치 않았다.

그런데 캐나다인 둘(일찌감치 잠자리로 간)에게 ABC를 안내하고 있는 아까의 그 가이드, 마르디 히말 트레킹을 말린다, 거기 정글이라고, 길도 무지 험하다며 그냥 ABC 같이 가잔다. 한국에서 온 50대 남성이 간드룩의 한 로지에서 숨진 채로 침실에서 발견되었던 게 달포도 채 되지 않았다지. 여행지에서는 소문이 무성하다. 사실일지도 아닐지도. 어쨌든 고산증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드물지 않게 있는 건 맞다. (* 나중에 산을 내려와 확인하니 불과 보름도 안 된 일이었다!)

“그래? 다음 길은 다음 걸음에! 다음 걱정도 다음 걸음에.”
일단 날 밝으면 결정하리.

한밤 주인과 실랑이가 좀 있었다....

옥영경(자유학교 물꼬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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