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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정채봉(1946~2001)은 어머니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열일곱에 시집 와서 열여덟에 그를 낳고 스무 살에 세상살이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가 어머니 얼굴을 궁금해하자 할머니가 장롱 깊숙한 곳에서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면서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가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라고 묻자, 할머니가 답했다. “아니지. 너희 삼촌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어. 형수 젖, 형수 물 하고.” 그는 이 말에 피식 웃었다면서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다”고 ‘스무 살 어머니’에 썼다.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 ‘너에게 묻는다’를 소설가 박민규는 산문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로 받는다. “지금 당신은 뜨거운가. 지금 당신은 타고 있는가. 그 온기를, 지금 당신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는가. 구멍은 맞춰져 있는가. 그 사이로, 누군가에게서 시작해, 누군가와, 누군가를 향한 바람이 불고 있는가. 당신의 몸을, 그 열기가 통과하고 있는가.” 소설가 최인호(1945~2013)는 “인생이란 짧은 기간의 망명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던가”라면서 “나는 지금 그 망명지에서 손꼽아 유배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고 썼다.

폐결핵으로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친구에게 돈을 만들어 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를 쓰고 열하루 만에 세상을 떴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기다리마.”

뭉클하신가. 신경림 시인이 가슴에 와 닿았던 산문을 모은 책 ‘뭉클’에서 인용한 글들이다. 왜 우리는 가슴 아프고 뭉클한 이야기를 일부러 찾아 읽는가. 공감과 연민이 빚어내는 정화작용이야말로 여전히 세상을 살아볼 만하게 만드는 힘인 건가. 서로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이들에게도 뭉클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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