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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저급한 말투에 착잡
언어는 우리 얼굴과 인생 지배
아름다운 단어를 표현할 때와
험한 표현때 얼굴 비교해보라
며칠 전 오후, 교차로의 신호등이 노란불로 막 바뀌던 찰나 교차로를 통과한 내 차와 유턴하려던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동시에 급정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고가 날 뻔했지만 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싶은 순간, 그 차 운전석의 창이 내려가고 나를 원수진 듯 노려본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야, 이 미친 ××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

살짝 미안한 마음에 마주 창을 내렸던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솔직히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저기요, 노란불에 건너온 건 맞지만 댁도 신호 바뀌기도 전에 유턴했잖아요?” 그리고 “나는 미친 ××이 아니며, 아직은 죽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러니까 당연히 환장하지도 않았어요”라고. 그 남자가 할 말 했으니 간다는 듯 쌩하니 차를 몰고 가버리는 바람에 그럴 기회는 사라졌다.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
집에 돌아와서도 그 남자의 사나운 눈빛, 차진 욕설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만한 일에 그렇게나 화를 내야 했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정말 갈 길이 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막 일터에서 궂은일이 있었을 수도, 지난밤 내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라면, 그 정도 험한 말은 일상인 사람일지도. 아마도 그 남자는 필경 자신이 했던 말 따윈 금세 잊었을 것이다. 낮의 그 아줌마가 그 말을 곱씹고 심지어 글로 옮기고 있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 학교에서는 ‘개웃기는 교수님’이라는 낯선 말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여학생이 “그 교수님 개웃기셔” 하자 주변의 친구들이 열렬히 동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여학생을 바라보았는데 ‘뭐지, 저 눈빛은?’ 하는 표정의 학생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얘야, ‘님’ 자를 붙이지 말든지, ‘개’자를 빼든지 그 조합은 좀 아니지 않니?” 다음 층에서 학생들 무리가 내리는 바람에 이번에도 나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먹이거나 언어와 사고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펼칠 생각은 없다. 늘어난 종편에 범람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차마 듣기 민망한 표현, 국적불명의 유치하고 어설픈 단어로 도배된 자막을 거론할 작정도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말이, 이런 단어가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지 일일이 따져보라는 건 더욱이 아니다. 다만 이따금 거울을 보며 말해볼 것을 권할까 한다. 적절하고, 정확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단어를 말할 때와 뒤틀리고 험하고 해서 불쾌한 표현을 발성할 때의 얼굴을 비교해보라고.

이라크전 당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일이다. 포로 통제에 서툰 신병들은 ‘개××’ 등의 욕설을 일정한 시간을 두고 거듭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신병들은 포로에 대한 연민이 사라져 짐승처럼 취급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고 실제로 포로들이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비슷한 예는 무수히 많다. 언어는 명백히 우리의 생각과 얼굴과 인생을 지배한다.

최근 한 대선 후보가 다른 후보를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한 일이 있었다. 그 후보의 행동 혹은 연설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여부를 떠나 꼭 이렇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자신의 견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차별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개돼지라고 또렷이 인쇄된 기사를 보면 뿌듯할까.

탄핵이 끝나고 바야흐로 대선 정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매체들은 제목을 자극적으로 경쟁하듯 뽑고 그 기사에 동조하는, 혹은 비판하는 노골적인 표현의 댓글이 달린다. 얼마나 더 강하고 거칠고 험한 표현이 넘쳐날지.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욕설과 비속어가 일상어로 굳어지는 일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언어로 먹고사는 사람이니 품위와 재치와 진정성을 갖춘 언어를 사용하는 후보의 출현을 강력하게 희망한다. 그래도 혹 모르겠다. 개웃기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면 찍고 싶어질지도.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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