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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칼럼] 다문화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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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03 01:13:55 수정 : 2017-04-11 17: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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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교수 아들 ‘귀여운 방송사고’, 지구촌 시청자들에 큰 사랑 받아 / 일부 언론 그의 아내 유모로 보도… 편견없는 배려·존중 정신 아쉬워 한국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세기 전반기 미국에서 활약한 한국인 중에 박노영이 있다. 고등학교 때 기미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중국과 유럽을 거쳐 미국에 건너가 1932년에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미국에서 ‘중국인의 기회’(Chinaman’s Chance)라는 영문 자서전을 비롯해 동아시아 관계 저서를 여러 권 출간해 관심을 끌었다.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 무렵은 미국이 경제 대공황의 어두운 터널을 한창 지나고 있는 중이어서 대학교수 자리를 얻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택한 길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해 생활비를 버는 것이었다.

박노영은 한번은 미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스팀슨의 초청을 받고 국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낡은 포드 자동차를 몰고 그의 저택 정문에 도착하자 집사가 달려나와 그를 옆문으로 안내했다. 집사는 당연히 박노영이 세탁물 일로 찾아온 중국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터리클럽이나 대학에 강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도 청중은 으레 그가 중국인 세탁소 주인이거나 찹수이(Chop suey·잡채라는 뜻)를 파는 요리사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얼마 전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교수가 영국 BBC방송과 가진 인터뷰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과 북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화제가 된 것은 방송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인터뷰 도중 갑자기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방송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켈리 교수는 집에서 인터뷰를 할 때는 서재 방문을 잠그는데 그날은 그만 깜박 잊고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켈리 교수의 아내가 서재에 들어가 아이들을 조용히 밖으로 데리고 나감으로써 일단 사태를 수습했다.

인터뷰 도중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TV 화면에 등장한 해프닝은 ‘귀여운’ 방송 사고로 오히려 지구촌 시청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켈리 교수는 방송을 마친 뒤 BBC에 바로 사과 편지를 보냈는데, 방송사 쪽에서는 오히려 인터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도 되겠느냐고 요청했다. 인터넷에 올린 BBC 인터뷰 동영상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현재 BBC 공식채널에서 2000여 만회가 조회됐으며, BBC 유튜브 채널에서는 900여 만회 조회가 됐다. 이 동영상은 지금도 계속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켈리 교수의 아이들의 ‘귀여운’ 방송 사고가 아니라 그의 아내 김정아씨를 둘러싼 문제다. 세계 각국의 언론 매체가 이 사건을 다루는 기사를 쓰면서 일부 영국과 미국 언론에서는 김정아씨를 ‘유모’나 ‘가정부’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관련 기사에서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을 ‘당황한 유모’라고 표현했다가 이후 ‘당황한 아내’라는 표현으로 고쳤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역시 그녀를 ‘겁에 질린 유모’라고 표현했다. 몇몇 서구 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가히 인종차별적이라고 할 만하다. 인종차별이라는 말이 자칫 지나치다면 인종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해도 좋다. 서구인과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아시아 여성은 으레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거나 집안일을 돌보는 가사 도우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드러낸 ‘슬픈’ 사건이었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가 이렇다 할 국경이 없이 작은 촌락으로 바뀐 지구촌에 살고 있다. 또한 여러 민족과 문화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존하는 다문화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 지구촌 시대와 다문화 시대에서 가장 큰 미덕은 뭐니 뭐니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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