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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를 접하자 청와대에 남겨진 진돗개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칠레 마푸체 족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개가 외지인들의 침략에 터전을 빼앗기고 사슬에 묶였다가 탈출하여 인디오들을 도와주며 죽는 이야기이다. 개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개가 인간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지닌 두려움의 냄새까지 명민하게 파악한다. 대지와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말하는 책에서 삭막한 현실을 떠올리는 정서가 스스로 한심했다. 먼지 쌓인 책장 구석에서 세풀베다의 출세작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을 어렵게 찾아냈다. 오래전 밑줄 친 문장들이 눈인사를 한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마존 밀림지대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이 노인은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안다. 1년에 두 번 밀림의 마을을 방문하는 치과의사에게 받은 연애소설을 읽고 또 읽는 그의 행위는 활자를 가슴에 심는 경건한 의식에 가깝다.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인 것은 당연하고, 어떤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정부의 꼬드김으로 밀림에 들어와 개간에는 실패하고 아내만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뒤 그곳의 자연과 동물들과 책과 더불어 살다가, 백인들에게 가족을 빼앗긴 암살쾡이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노인은 복수에 눈이 멀어 죽음을 각오한 살쾡이를 어쩔 수 없이 죽인 뒤 밀림의 처녀성을 유린한 인간들을 저주하며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겨울부터 봄까지 머리와 가슴을 덮었던 자욱한 먼지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아마존의 저 노인처럼 이제 ‘연애소설’이라도 붙들었으면 좋겠다. 안경이 눈물에 젖어 흐릿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슬픈, 영원히 반복되는 그 이야기들에 다시 조용히 빠져들 수 있을까. 한 음절 한 음절 쓰다듬으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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