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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현실과 예술, 그리고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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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8 01:11:40 수정 : 2017-04-11 16: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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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외면한 예술은 몽상일 뿐… 예술가는 현실적 상상가 돼야 / 특별함 아닌 공통과 다름으로 대중들과 소통하는 열정 기대 후계 없이 늙어가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 문제와 그 시대의 연극 생산을 엮어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흥미롭게 파헤친 안나 포에스터 감독의 영화 ‘위대한 비밀’에서 필자의 뇌리를 강타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실제로 쓴 것으로 영화 속에서 상정된 옥스퍼드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는 연극 ‘리처드 3세’의 감동의 힘을 빌려 당대 권력자인 처남 로버트 세실을 몰아내려 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내 그의 계획을 처참히 무산시킨 세실은 다음과 같은 말을 경멸적으로 한다. “아버지는 (당신을 왕으로 만들려) 당신에게 국가경략(經略)의 모든 것을 가르쳤지. 그러나 당신은 실패였어. 심지어는 영지(領地)도 엉망으로 관리해 부도가 날 지경이었지. 당신이 한 것이라곤 시, 시뿐.” 왜 이 대사가 요즘 다시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일까.

전인한 서울시립대 교수·영문학
영화의 상상력은 드 비어의 실패 이야기를 예술의 현실에서의 가능성과 좌절의 이야기로 엮어냈기에 아름답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실패는 실패이고, 드 비어는 자신의 비현실성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예술가라는 것이다. 드 비어의 이야기는 뛰어난 예술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유리된 예술의 무참한 실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리처드 3세’를 본 관객들은 혁명의 열정을 느끼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혁명을 청원하러 몰려가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실이 미리 준비한 군대에 의한 학살일 뿐이었다. 드 비어는 혁명의 열정을 자신의 관객에게 불어넣는 데는 능했으나 실제로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능했다.

상상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드 비어가 위대한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려받은 영지 정도는 쓸 만하게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무참하게 실패했을까. 위대한 예술가와 현실적인 사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답은 ‘아니다’여야만 하겠다.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든, 현실을 구성하는 창조적인 시발점이든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예술을 만드는 예술가 역시 현실에 굳건히 발을 붙인 현실적인 상상가여야 한다. 현실과 유리된 상상은 몽상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술가들에게 현실과 유리돼도 되는 특별함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는 숫자를 잘 다루고, 누구는 과학에 능하고, 누구는 손재주가 좋아 물건을 잘 만드는 것처럼 누구는 글을 잘 쓰고, 악기를 잘 연주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일 뿐이다. 어느 누구가 다른 누구보다 특별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심지어 보호를 받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예술이 현실의 한계를 그대로 넘어야 하는 우리에게 힘을 주려면 예술가 역시 현실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이를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예술가는 우리처럼 연말정산하면서 끙끙대고, 새로운 정보기술(IT) 기기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기도 하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머리카락 휘날리면서 뛰기도 하는 누가 예술가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냥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 같은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구조조정의 파고가 높은 요즘 대학가에서 예술을 다루는 학과의 경우 냉담한 시선을 받을 때가 있다. 돈이 많이 들어가거나 학교의 여러 지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다. 부당하다. 하지만 이런 부당한 시선에 대해 예술가들이 특별함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각각의 학문의 다름은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고민해야 할 공통의 문제가 있고, 예술가들도 이 문제는 같이 극복하려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함이 아닌 공통과 다름을 비롯한 현실의 기반 위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을 기대하는 사회, 그리고 이에 적극 부응하는 예술가를 보고 싶다.

전인한 서울시립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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