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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각되면 혁명” 대 “탄핵되면 참극” / 말없는 다수가 정치인 선택 지켜본다 오늘 서울 도심엔 생각이 서로 다른 두 군중이 모인다. 한쪽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돼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고, 다른 한쪽은 기각 또는 각하돼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전자는 촛불 군중, 후자는 태극기 군중이다. 탄핵열차가 막바지 질주 중이지만 양쪽 다 흡족해할 종착역이 존재할 까닭이 없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비극이다.

5000만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바라는 것은 최선의 답이다.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소망이고 기대다. 헌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최선의 답이 아니다. 최후의 답이 도출될 뿐이다. 그 답이 궁극적으로 옳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헌재재판관들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재판관 8인이 내놓을 최후의 답은 세상이 거꾸로 돌지 않는 한 언제나 정답일 수밖에 없다.

이승현 편집인
왜 그런가. 대한민국 헌정체제는 그런 약속을 토대로 세워진 체제여서다. 그런 약속이 무시되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는, 알고 보면 허약한 체제여서다. 헌재가 결정을 내리면 그것은 정답으로 채택되고, 모두 좋든 싫든 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 군중도, 태극기 군중도 입맛에 안 맞는 답이 나올 경우 고분고분 수용할 의사가 손톱만큼도 없어 보인다. 외려 그런 답이 나올까 봐 미리 길거리로 몰려나와 힘자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세 대결이 빚어진다. 그것도 지구촌이 주목할 만큼 대대적으로.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87년 체제의 대한민국은 법치주의에 힘입어 때론 비틀거리고 때론 넘어지면서도 큰 다툼과 큰 손실 없이 여기까지 왔다. 대법원이나 헌재가 함께 갈 길을 제시하면 이를 수용해 사회적 자산으로 삼아온 덕분이다. 지금은 이례적 상황이고 국가적 위기다. 힘자랑을 통해, 세 대결을 통해 최후의 답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길거리를 누빈다. 결국 어찌 될까. 한쪽에선 “기각되면 혁명”을, 다른 한쪽에선 “탄핵되면 참극”을 외친다. 헌재만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에 대한 노골적 협박이다. 빠져나갈 길도 없다. 법치주의가 설 자리가 있는지 의문이다.

오늘 맞불 집회에 참가하는 대다수 시민의 가슴속에 불순하거나 비열한 의도가 담겨 있을 리는 없다. 다들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과 군중은 다르다. 일찍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갈파했다. “군중은 생겨나는 그 순간부터 더 많은 사람이 거기에 가세하길 바란다”고, “군중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파괴욕”이라고. 카네티는 불의 비유를 들기도 했다. “불은 신속하게 번져간다. 전염성이 강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어디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파괴적이다.… 이 모든 점이 군중과 동일하다”고.

경찰은 오늘 서울 광화문 일대에 200여개 경찰 중대를 투입하고 차벽을 세울 방침이라고 한다. 불과 불이 만나 모든 것을 태울 대형 화재로 번질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화벽을 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맞불 집회는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고, 헌재 결정이 나온 뒤에는 또 어찌 비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말없는 다수는 걱정이 태산이다.

촛불이든 태극기든, 이제 고민과 자중(自重)이 필요하다. 단순한 의사 표현이 목적이라면 세상이 다 알 만큼 표현은 됐다. 여기서 한두 걸음 더 나아간다면 세 대결을 적극 거드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세 대결로 헌재를 압박해 최후의 답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믿는 것이다.

법치에 반하는 그런 신조가 통한 사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혁명이나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이 반면교사다. 역사는 중학생 연령대의 홍위병들에게 무참히 집단 구타를 당한 끝에 변사체로 발견된 작가 라오서(老舍·1899∼ 1966)를 비롯해 엄청난 규모의 희생자를 낳은 광기의 유혈극이었다고 증언한다. 심지어 법치국가의 대명사인 미국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남부 지역에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군중(Mob) 재판을 허용해 수많은 오점을 남겼다. 미국 인권사에 큰 상흔으로 남은 1873년의 콜팩스 대학살이 대표적이다.

오늘 촛불을, 태극기를 든다고 해서 곧바로 문화혁명을, 군중재판을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헌정체제는 그렇게까지 허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 대결의 양상이 날로 악화하는 것은 위태롭다. 오늘 광장에서 촛불을, 태극기를 들고 각자가 믿는 정의를 외치기에 앞서 먼저 다짐할 것이 있다. 최후의 답에 대한 승복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말없는 다수는 촛불에도, 태극기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할 이들도 있다. 정치인들이다. 이제 말 장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의 헷갈리는 언행도 삼갈 일이다. 더 늦기 전에 법치 원칙을 우롱하는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고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깨끗이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 생명과 자유의 기반인 법치주의가 다시 숨 쉴 수 있다. 그러는 대신 군중심리에 부화뇌동하거나 맞불 집회에 기름을 끼얹으면서 지지율 상승 같은 사익이나 추구한다면 지도자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말없는 다수는 진저리를 치면서 마음으로 돌을 던질 것이다. 말없는 다수의 공분이 모든 것을 삼키는 큰불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고….

이승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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