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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소설 속 형사법정, 현실 속 탄핵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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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21 22:23:10 수정 : 2017-02-21 22: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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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어떤 심판 내려도 국론 두 쪽
인용·기각 외 제3의 길은 없는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 심리 과정, 그에 대한 정치권과 민심의 엇갈린 압박추이 등을 지켜보면서 부질없게도 작가 이병주의 초기 작품 ‘소설·알렉산드리아’ 속 중요무대인 알렉산드리아 지방법원 법정을 줄곧 떠올렸다. 법정에 나와 있는 두 피고인은 독일 나치정권의 게슈타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독일 국적의 남자 한스 셀러와 스페인 출신의 여성 사라 안젤이다.

검사는 준엄한 논고를 개진하고 나서 두 남녀 피고인에게 15년씩의 징역형을 구형한다. 하지만 두 변호인은 냉철하고 정연한 논리로 피고인들에게 무죄선고를 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한다. 먼저 A 변호인은 “법률이 개인의 복수를 금하는 건 개인을 대신해서 법률이 이를 처리해 준다는 전제가 암암리에 승인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건의 경우 개인의 원한을 법률이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고 변론한다. 이어 B 변호인은 사건 경위를 세심하게 설명한 뒤 정당방위에 의한 과실치사 혹은 정당방위의 과잉에 의한 과실치사 정도임을 주장한다. 며칠 후 같은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이 법원의 최종 결정을 엄숙하게 ‘선언’한다.


조규석 언론인
“당 알렉산드리아 법정은 한스·사라 사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한스 셀러와 사라 안젤이 이 결정이 있은 후 1개월 이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퇴거할 것을 조건으로 판결을 보류하고 즉시 석방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한스 셀러와 사라 안젤이 퇴거하지 않을 때는 다시 날을 정하여 판결보류를 해제하고 선고공판을 연다. 이 결정은 알렉산드리아 검찰과 합의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결정은 판결이 아니므로 판례로서 취급하지 않는다.”

법원의 절묘하고도 역사적인 결정을 그날 언론보도로 알게 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크게 환호한다. 소설은 필화사건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전직 언론인 형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16번째 편지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형이 보낸 편지의 끝마무리는 니체의 어록이다. “자기 힘에 부치는 무엇인가를 시도하다 파멸하는 인간, 나는 그를 사랑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그것이 헌재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결정되든 두 쪽으로 확연히 갈라진 민심을 통합시키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동안 보아온 대로 촛불과 태극기의 이념적·정치적 간극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거대행렬에서 저마다 정당성을 외친 개인과 세력 사이의 감정적 괴리도 쉽게 메워질 리가 없다. 박근혜에 대한 증오와 애정은 그렇게 극명하게 갈려 있다. 따라서 과연 헌재의 결정은 탄핵소추에 대한 인용 혹은 기각이 아닌 다른 ‘제3의 길’이 없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복수와 증오의 기류를 생각하노라면, 사실상 무망할지언정 개인적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닥 희망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허구속의 알렉산드리아 법원처럼 현실의 대한민국 헌재가 탄핵 피청구인 박근혜에 대해 일정 기간 이내에 대통령직 사임을 조건으로 탄핵 여부의 결정을 유보한다. 박근혜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탄핵법정을 다시 열고 즉각 소추를 그대로 인용한다. 당연히 그 결정은 판결이 아니므로 헌재의 판례로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

다른 제3의 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탄핵 소추 측인 국회의 정치적 해법이다. 여야 합의로 박근혜 사퇴시기를 못 박는 조건으로 탄핵 소추를 취하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직 헌법재판관 한 분에게 문의한 결과 여야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탄핵소추의 취하가 법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탄핵 소추에 대한 인용이든 기각이든 헌재 결정 이후 야기될지도 모를 혁명적 혼란을 감안하면 그런 정치적 해법도 모색해볼 만하지 않은가 싶다.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엄중한 사건은 피청구인인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성장한 시기로부터 적어도 반세기에 걸쳐 이어진 대한민국의 성취와 질곡이 하나의 병리적 응어리로 뭉쳐 있다가 일거에 터져버린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탄핵소추를 심리하는 재판관들은 물론 여야 정치인들의 우리 현대사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현명한 통찰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조규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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