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외정책 변화는 한반도 정세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한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갑자기 이라크, 이란, 북한을 지목하고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수개월 전에 발생한 9·11테러가 그 배경이었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대북정책 강경 선회 조짐은 그 전부터 있었다. 그해 10월 미국은 북한 핵개발 재개 움직임을 이유로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을 중단했고, 북핵문제가 다시 국제사회 현안으로 부상했다. 한국 외교는 시련에 처했다. 사전 대비에 소홀했던 탓이다.
박완규 논설위원 |
가장 유념할 게 북핵문제다. 지난주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에 이어 한·미·일이 독자 대북 제재조치를 발표했다. 대북 제재망이 더욱 촘촘히 짜여진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외교가 일각에서는 북한 도발과 국제사회 제재가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우리 외교부가 협상 가능성을 배제하고 제재에 몰입하는 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다.
최근에 만난 정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북·미 핵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 조짐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수개월간 북한 외무성 핵심 인물들이 미 전직 관리들과 만나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화 가능성을 탐색하고 북한 입장을 전했다. 미국에서도 우선 북한 핵동결을 전제로 협상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핵동결로 시작해 핵폐기로 이어지는 출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하다가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되면 대화의 창을 곧바로 닫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외교의 고질적 병폐는 긴급한 현안이 발생하면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져 외교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다는 데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전략이 폐기되는 시점인데도 우리 외교부가 제재에만 매달리고 대화의 문을 잠가 두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외교안보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불투명하다. 국가안보실장, 국가안보회의(NSC) 사무처장, 외교안보수석으로 이뤄진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은 현안마다 따로 움직여 혼선을 빚곤 한다. 외교안보전략이 겉도는 이유다.
이제라도 정부 외교안보팀은 전열을 가다듬고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트럼프 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을 짜는 일에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국정공백을 이유로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나서야 한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되 유연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공직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지난 주 트럼프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미·중 관계의 근간을 흔들었다. 트럼프 외교는 이미 시작됐고, 한반도 주변 정세에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할 시간이 없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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