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농심은 타들어가고 있다. 멀리서는 아름답게 보이는 황금 들녘이 정작 농민들에게는 가슴의 상처처럼 다가온다. 전국 곳곳의 농토에서 아직 베지 않은 벼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발아 현상은 태풍과 잦은 비가 올해 유독 심하게 발생했다. 특히 전남 지역의 피해 면적만 하더라도 2만여ha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별로는 고흥이 1524㏊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어 함평 1120㏊, 순천 500㏊, 영암 197㏊, 영광 152㏊ 등 순이다.
이 같은 수발아 현상을 겪은 벼를 도정하면 품질이 하락하게 된다. 이렇게 도정된 쌀은 식용이 아닌 사료용으로 사용되기 일쑤다. 농민들로서는 사람이 아닌 동물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는 자괴감이 들만하다.
수발아 현상을 몇 차례 겪은 농가는 사실상 1년 농사에 헛심만 쓴 상황이다. 수발아 현상을 보인 벼가 정상적인 벼와 섞이기라도 하면 각 고장별로 키워온 ‘브랜드 쌀’의 가치도 떨어지게 된다.
쌀값마저 폭락한 상태에서 농심은 쪼그라들고 있다. 수발아 벼로 인한 피해 비율이 50%를 넘지 않으면 생계지원비마저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재해보험 가입 절차도 어렵고, 보상 기준은 더 까다로운 게 오늘의 농촌 현실이다.
농가 보호와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수발아 벼를 별도로 매입하는 방안도 농정당국은 고민해 볼 수 있다. 농협에서 수발아 벼를 별도로 수매하는 것을 거부하면 농민들의 선택은 별로 없다.
헐값에 사료용으로 넘기거나 정상적인 벼와 함께 도정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수발아 벼로 인해 타들어간 농심을 보듬어야 할 때다. 농촌이 안정되지 않으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진다. 어려운 환경에서 농촌을 지키고 있는 농민들을 지켜줘야 한다.
도시를 보호하는 토양인 농촌과 국가정신의 근본인 농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사회 2부 한승하 기자 hsh6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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