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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마지막 토론의 씁쓸한 뒷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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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20 23:24:14 수정 : 2016-10-20 23: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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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 술수 반칙으로 얼룩진
정치소설 뛰어넘는 미국 대선
승복도 “그때 가서 말하겠다”
설상가상에 요지경이다
토론 사회자가 문제였다. 돌도끼를 날리듯 대뜸 야유성 질문을 날렸다. “여성들의 진술서가 9개 더 있습니다. 각각의 진술서들은 (당신이) 여성이나 아동에게 신체적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여성이나 아동들만 때리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사회자는 그렇게 공화당의 유력 후보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붙였다.

물론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 경합 중인 올해 미국 대선 얘기는 아니다. 미국 언론인 짐 레러가 쓴 정치소설 ‘마지막 토론’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 레러는 대선 토론 진행을 10여차례 맡았던 공영방송 앵커 출신이다. 자기가 했던 역할 대신 하고 싶었던 역할을 투사한 것일까. 소설 속 사회자 하울리는 패널 3명과 함께 공화당 후보 메레디스를 자극해 일종의 ‘분노 발작’을 끌어냈다.

이승현 논설위원
메레디스는 여러모로 트럼프와 흡사하다. 독실한 종교인이자 품격 있는 정치인으로 통하고, 대중적 인기가 압도적이란 점만 빼고는. 그는 한방에 훅 갔다. 생방송되는 TV토론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늘어놓는 실태를 보이면서. 그의 마지막 발언은 이런 내용이다. “네놈들은 ××, 다 죽었어! 다 죽여버릴 거야!”

현실과 소설은 다른 법. 트럼프와 클린턴의 어제 마지막 토론은 격렬한 난타전이었지만, 그래도 상식선에서 진행됐다. 사상 최악의 저질 토론으로 꼽힌 9일의 2차 토론에 견줄 바도 아니었다. 폭스뉴스 앵커 크리스 월러스는 게임의 룰을 지켰고 후보의 분노 발작도 없었다.

속내로 들어가면 얘기는 확 달라진다. 이것이 문제다. 현실이 소설을 뛰어넘는 감마저 없지 않다. 소설의 사회자와 패널은 대선주자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보고 메레디스를 공격했다. 똑같은 이들이 트럼프와 클린턴을 마주했다면 어찌 나왔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는 물론이고 힐러리도 마음 편히 무대에 서 있었을지 여간 의문스럽지 않다.

트럼프는 이미 만신창이다. 독특한 이념 성향에 탈세 논란, 음담패설 파문, 성추행 전력 폭로까지 줄줄이 더해진 탓이다. 오죽하면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가 “트럼프가 성범죄자인지 묻는 국민투표로 흐르고 있다”고 촌평했겠나. 레러의 소설에 나오는 메레디스의 지저분한 혐의가 무색할 지경이다. 클린턴 또한 웃을 형편이 아니다. 어제 토론에서 ‘대선에 나와선 안 될 범죄자’라는 트럼프 공격을 받았다. 클린턴도 ‘가장 위험한 대선후보’라고 역공을 가했지만 도토리 키재기다. 둘 다 미덥지 않은 것이다.

레러의 소설은 음모와 술수, 반칙이 얽히고설키는 도발적 작품이다. 국민 대표자를 뽑는 선거 현실, 정치 현실은 그런 상상력의 소산과 닮을 수 없다. 닮아서도 안 되고. 그런데 왜 이번 미국 대선은 소설보다 외려 더 초라하고 한심하게 보이는 것일까. 미국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자유민주주의 전반에 대한 위협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근대 민주주의 종주국이다. 인간의 자유를 노래한 프랑스 인권선언이 당대에 실효를 보지 못한 것과 달리 미국의 권리장전은 새 지평을 열었다. 그 영향력에 힘입어 민주화의 빛을 본 나라가 허다하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파급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20여년 전 동구권 와해와 더불어 등장한 신생국들도 새 헌법과 법제가 필요해지자 대거 미국의 틀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미국 대선이 저 꼴로 돌아가고 있다. 종주국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어제 대선 결과 승복 여부에 대해 “그때 가서 말하겠다”고 답해 불복을 시사했다. 설상가상에 요지경이다. 상상력 풍부한 레러도 이런 마지막 토론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트럼프가 11월8일 질 경우 승복을 거부하면 어찌 될까. 미국 민주주의가 늪에 빠질 공산이 없지 않다. 사회자가 부당 개입해서라도 바로잡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게 된다. 힐러리가 토론 3연승을 거뒀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미국 대선은 최후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뉴욕양키스의 전설적 포수였던 요기 베라의 어록을 곱씹게 되는 국면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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