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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 안녕하십니까] 식사도 제때 못하고… '손주농사'에 할마들 골병

입력 : 2015-12-02 19:03:14 수정 : 2015-12-03 0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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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대별로 본 ‘행복과 불행’(20) 황혼 육아 전선의 서글픈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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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농사 끝, 자식의 자식 농사 시작.’

지난 여름 전파를 탄 한 건설회사의 TV광고 카피다. 이 광고는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이 결혼식장에서 웃으며 손뼉을 치는 장면으로 시작해, 보채는 손자를 등에 업은 채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거나 여름철 손자에게 부채질하는 ‘할마’(할머니와 엄마를 결합한 신조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식 농사를 끝낸 지 얼마 안 된 조부모들이 손주 농사까지 떠안는 ‘황혼 육아’란 시대상을 반영한 광고였다.

◆황혼 육아로 골병드는 친정, 시댁 부모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김모(68·여)씨는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맞벌이에 나선 딸 대신 두 살배기 손녀를 돌보느라 관절염이 악화됐다. 김씨는 “손녀를 보면 피로가 가시지만 나이가 드니 몸이 따라주지 않아 처음에는 손녀를 돌보는 것에 손사래를 쳤다”면서도 “하지만 딸이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다고 하소연해 어쩔 수 없이 손녀를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친정이나 시댁에 아이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는 3년 전 맞벌이 부부 전체의 절반에 달했다. 2012년 국무총리실 산하 육아정책연구소가 만 0∼5세 영·유아를 둔 2528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이 중 맞벌이 가구는 37.1%였으며 조부모가 양육을 돕는 맞벌이 가구 비율은 만 0∼2세 영아와 만 3∼5세 유아의 경우 각각 54.5%, 44.9%였다. 당시 맞벌이 가구를 포함해 1133가구(45.0%)가 “혈연으로부터 양육 지원을 받는다”고 답했다.

보모가 된 조부모들은 황혼기에 여유를 즐기기는커녕 쉬지도 못하는 가사노동에 시달린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기준 60세 이상 여성은 평균 1.34명의 손주를 하루 8.86시간, 일주일에 5.33일 돌봤다. 일주일에 법정 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을 초과하는 47.2시간을 돌보미로 일한 셈이다.

노년기에 육아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골병이 드는, 일명 ‘손주병’을 앓는 조부모들도 적지 않다. 손주병은 국립국어원이 2012년 꼽은 신조어로, 조부모가 맞벌이하는 자녀 대신에 손주를 돌봐주다 생기는 질병을 뜻한다. 퇴행성 관절염을 비롯해 허리 디스크와 손목 통증, 대사증후군, 불면증이 대표적이다.

대사증후군은 복부 비만과 혈당 상승, 혈압 상승, HDL콜레스테롤 저하, 중성지방 상승 등 5가지 만성질환 가운데 3가지 이상을 가진 경우를 말하며, 심혈관 질환이나 암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육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때 식사하지 않거나 달거나 짠 음식, 고기를 선호하게 돼 대사증후군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코리아베이비페어’에서 조부모들이 육아용품을 살펴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손주 맡았다면 체력에 맞게 돌봐야

황혼 육아가 오히려 조부모들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은주 교수(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는 “최근 황혼 육아가 조부모의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신체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며 “손주 덕분에 담배를 끊거나 활동량이 많아져 체중을 조절할 수 있고, 외로움이나 우울증도 덜해 건강이 좋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연구진은 손주를 돌보는 50세 이상 유럽인 수만 명의 자료를 분석해 지난 8월 황혼 육아가 우울증 억제, 일상생활수행능력(ADL) 증진 등에 도움이 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부모들이 각자의 체력에 걸맞게 손주들을 돌보고 자신의 시간을 갖는 노력을 할 때 얘기다. 조비룡 교수(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는 “‘손주를 안아 주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운동을 못해 혈당수치가 높아졌다’는 식의 말을 고령 환자들에게 심심찮게 듣는다”며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저당·저염·채소 위주의 식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부모들의 손주 돌보기 현상은 개별 가정의 문제라기보다는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생활이 가능한 경제적 문제이자 맞벌이 부부를 지원하는 복지 부실의 문제이다.

최인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사는 “영아 보육시설이 많지 않고 영아 어린이집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끊이지 않아 만 0∼2세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 비율이 낮아질 것으로 보진 않는다”며 “정부가 육아휴직과 유연근무제 등 일·가정 양립제도 내실화로 부모들이 아이를 돌볼 권리를 보장하고 보육시설 평가 등을 통해 보육서비스의 질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보육정책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선공약으로 초등 돌봄교실을 고학년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올해 예산이 삭감되며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돌봄교실까지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안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초등 돌봄교실을 내실화한다는 계획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또 정부는 올해 예산 부족을 이유로 자택 방문 형식의 아이돌봄서비스 이용 가능시간을 연 720시간에서 480시간으로 줄였다. 내년에는 아이돌봄서비스 지원 대상 자체가 축소될 예정이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여전히 부족하고,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편성은 매년 차질을 빚고 있는 형편이다.

이옥 덕성여대 아동가족학 명예교수도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다”며 “정부는 질 좋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확충해 일·가정 양립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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