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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적' 최능진, 재심 무죄 판결로 64년 만에 명예회복

입력 : 2015-08-27 19:02:04 수정 : 2015-08-27 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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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과거사 바로잡고 유가족도 긍지 되찾는 계기 되길"

일석 최능진(1899~1951)
‘이승만의 정적’으로 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일석(一石) 최능진(1899∼1951·사진) 선생이 사형 집행 64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는 27일 6·25 전쟁의 와중인 1950년 국방경비법상 이적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처형까지 당한 일석의 재심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검찰단에 당시 재판 기록을 촉탁했지만, 모두 남아 있지 않다”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 중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자료는 재심 대상 판결문이 유일하지만, 여기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우리 사법체계가 미처 정착·성숙되지 못한 혼란기에 6·25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한다”고 강조했다.

일석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했다. 1917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도산이 설립한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29년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돼 청년 계몽에 주력했다.

1937년 흥사단 계열 민족단체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일석은 1945년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에 취임했다. 옛 소련 군대가 진주하면서 건준은 해체됐고, 같은해 9월 일석은 북한을 떠나 서울로 옮겼다. 일석의 미국 유학 경험과 학식을 눈여겨본 미군정청은 그를 경무부 수사국장에 임명했다. 장차 대한민국을 지킬 경찰을 창설해야 할 중책이 일석의 두 어깨에 지워진 듯했다.

하지만 일석은 곧 경무부장인 유석 조병옥과 충돌했다.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했거나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를 경찰관으로 대거 등용하려는 유석의 정책에 반발하던 일석은 1946년 12월 급기야 경찰에서 해직되고 말았다.

초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구상에도 반대했던 일석은 1948년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 총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지역구는 이승만과 같은 서울 동대문갑이었다. 당시 아무도 이승만과 겨루려 하지 않아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이 유력했는데 느닷없이 도전자가 생긴 것이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의 물밑 공작으로 후보 등록은 무효화됐고, 일석은 이승만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48년 10월 일석은 결국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구속됐다.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확정받은 그가 수감생활을 하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얼마 지나 교도소에서 풀려난 일석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평화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 수복에 성공한 이승만정부는 곧 점령 기간 북한에 부역한 인사들의 색출과 처벌에 나섰다. 일석의 경우 남북 양측에 평화통일을 촉구하는 운동을 했을 뿐인데도 국군은 그를 ‘친북활동가’로 단정해 11월 체포했다. 적용된 혐의는 오늘날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국방경비법상 이적죄였다. 1951년 1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된 일석은 그해 2월 11일 총살로 52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명박정부 시절인 2009년 9월 “일석은 이승만 정권에 맞선 뒤 헌법에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 자격도 없으며 재판권도 없는 군법회의에서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부당하게 총살당했다”고 결론짓고 법원에 재심 수용을 권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6·25 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일석이 주도한 ‘즉시 정전·평화통일 운동’은 김일성 등에게 전쟁을 중지하고 민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취지를 제의함으로써 민족상잔의 비극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그에게 적용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일축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고인의 인격적 불명예를 복원하고 과거사를 바로잡으며 유가족이 자긍심을 되찾는 위안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염원도 밝혔다.

재판을 방청한 일석의 차남 최만립(81) 대한체육회 원로고문은 “통한의 세월이었다”면서 “사법정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하며, 이제야 선친의 한을 풀고 명예회복을 했다”는 말로 감격을 표현했다. 일석의 장남은 박정희정부 시절 외무부 대변인, 대통령 의전비서관, 공보비서관 등을 지낸 최필립(1928~2013)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이다. 아래는 일석 최능진 선생의 연보.

■일석 최능진 연보

▲1899년 =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

▲1917년 = 미국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대학으로 유학

▲1927년 = 미국에서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 가입

▲1929년 =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임용

▲1937년 = 흥사단 계열 민족단체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

▲1945년 8월 =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 취임

▲1945년 9월 = 월남 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 취임

▲1946년 12월 = 친일 경력자의 경찰 임명에 반발하다 퇴직

▲1948년 5월 = 5·10 총선 출마하려다 후보 등록 무효화

▲1948년 10월 =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구속돼 징역 5년 확정

▲1950년 6월 = 6·25 전쟁 와중에 풀려나 평화통일운동 전개

▲1950년 11월 = 서울 수복 후 부역행위 혐의로 국군에 체포

▲1951년 2월11일 =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 확정돼 총살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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