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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르 찾아서] 〈68〉 장수황씨(長水黃氏)·평해황씨(平海黃氏)

長水黃氏,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 때부터 가문 크게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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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2-18 21:32:46      수정 : 2014-02-18 23:04:52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장수황씨의 시조는 황경(黃瓊)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 벼슬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황씨의 도시조(都始祖)인 황락(黃洛)의 후손으로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진 황을고(黃乙古)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장수황씨 측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황경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가 황석부(黃石富)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장수황씨가 전북 장수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0세손 황공유(黃公有) 때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명종 때 전중감(殿中監)으로 있었으나,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피해 장수로 내려가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장수황씨는 15세손 황감평(黃鑑平)이 후학을 위한 덕망있는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18세손인 황석부(黃石富)까지 고증할 자료가 없을 정도로 뚜렷한 문벌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장수황씨의 중시조이자 황희(黃喜)정승의 증조부인 황석부(호조참의에 추증)때부터 가문이 번성했다. 그 후 후손들이 황석부를 기세조로 삼고,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장수황씨는 조선시대 정승의 대명사가 된 황희 정승 때부터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는 조선의 명재상으로 정승의 지위에 있었던 기간만 24년이며, 영의정을 18년 동안 재위하였다. 그의 아들인 황치신(黃致身)은 우의정을, 황수신(黃守身)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 외 임진왜란을 예고한 황윤길(黃允吉), 또 구한말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黃玹)이 유명하다. 장수황씨의 조선조 과거급제자는 모두 160명인데, 그 중 문과에 45명, 무과에 16명, 사마시에 98명, 의과에 1명이 있다. 

조선시대 명재상의 대명사가 된 황희 정승. 그는 재상으로 재임했던 기간이 24년, 영의정 재임기간만 18년이나 되었다.
장수황씨의 분파로는 황희 정승 아들 대에서 호안공파(胡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열성공파(烈成公派)로 나뉘어지고, 이들은 다시 부정공파(副正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전첨공파(典籤公派), 판서공파(判書空破), 사과공파(司果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호장공파(戶長公派)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또 부정공파에서는 첨정공파(僉正公派), 의창공파(義昌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도정공파(都正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첨지공파(僉知公派)가 나오고, 현령공파에서는 현감공파(縣監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가, 전첨공파에서는 봉교공파(奉敎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영춘공파(永春公派), 서담공파(西潭公派), 영흥공파(永興公派), 학생공파(學生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가 나왔다.

장수황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4만5567가구, 총 14만65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황희 정승이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임진강변에서 기러기를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는 파주의 반구정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연혁과 인물

장수황씨의 시조 황경은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황락의 후손이다. 황씨는 삼국사기에 대야성 성주인 ‘품일’(화랑관창의 아버지)의 성이 황씨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황씨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장수황씨가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의 세 아들 중에 둘째인 황을고가 장수군에 봉해져서 장수로 본관을 정했다는 것에 대해선 장수황씨 내에서도 부인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신라시대 ‘군(君)’이라는 벼슬에 봉한 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수황씨로 본관이 정해진 것은 10세손인 황공유가 이의방의 난을 피해 장수지역에 내려가 세거하면서부터라는 주장이 실증적인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장수황씨의 후손들은 황희 정승의 증조부인 황석부를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이 처음 표착했다는 경북 울진군 기장면에 평해황씨 시조제단인 월송정이 있다.
장수황씨 문중의 역사적 인물로는 무엇보다도 황희 정승과 그 아들들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황희 정승은 조선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그는 강릉부사였던 황군서의 둘째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간청으로 두문동을 나와 벼슬길에 올랐다. 태종 때에는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며,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세종 때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가 재상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총 24년이었으며, 그 중 영의정 재임 기간은 18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그는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는 두 번의 큰 정치적 시련을 맞은 적이 있다. 하나는 고려가 망해 두문동에 은거하게 되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하다가 강등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된 때였다. 하지만 두 번 모두 황희를 아낀 이성계와 세종의 배려로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로는 황치신, 황보신, 황수신, 황직신 등 4형제가 있는데,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그 중 첫째 황치신은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도총관 판중추부사에 올랐고, 품계는 종1품의 숭록대부에 올랐다. 황희의 셋째 아들 황수신은 세종 때에 음보로 벼슬길에 올랐다. 문종 때 병조참판, 단종 때 경상감사로 삼포왜란을 평정한 후 찬성사 겸 예조판서에 올랐다. 세조 즉위에 참여하여 좌익공신이 되고 남원군에 봉해졌다.

그 밖의 장수황씨 인물로는 황사효가 있다. 그는 세종 때에 문과에 올라 직제학, 대사헌,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또 오위장인 황열의 아들 황정욱(黃廷彧)은 동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등을 거쳐 광국일등공신으로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발발 후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 ‘보’를 관동으로 배종하였다. 문장에 능한 그는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지천집(芝川集)’을 저술하였다.

황윤길(黃允吉)은 황희의 고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황치신이다. 김성일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고했으나,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상반된 주장으로 대비책을 세우는데 실패했다.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황진(黃進)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안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군을 안덕원에서 격퇴했다. 훈련원 판관이 되어 이치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여, 그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올랐다.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전사했다.

영조 때 이조,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황경원(黃景源)은 삼례에 정통했고, 특히 고문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부사였던 황관의 아들인 황맹헌(黃孟獻), 황여헌(黃汝獻), 황효헌(黃孝獻) 삼형제가 문장과 서예에 뛰어나 가문을 빛냈다. 또 황엽(黃曄)은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했다. 황승원(黃昇源)은 순조 때의 명신으로 구한말의 야사를 엮어서 편찬하였으며, 황희의 후손인 황현(黃玹)은 구한말 역사서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지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를 쓰고 음독 자결하였다.

장수황씨의 근현대 인물

황의돈은 만주 간도의 명동서숙을 창설하였고, 항일운동연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동국대, 단국대 교수를 역임하며 한국사에 관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장수황씨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 황낙주, 황진하(이상 국회의원), 황영하(총무처장관), 황정연(해군참모총장), 황필주(육군소장) 등이 있으며, 법조계와 학계에는 황도연(대전지법원장), 황인철, 황인만(이상 변호사), 황인행, 황상현(이상 부장판사), 황태연(동국대 교수), 황용주(중앙대 교수) 등이 있다.

또 재계와 기타 인물로는 황하주(한국감정원장), 황인용(아나운서), 황용주(동영기업사장), 황영주(한의사), 황의성(동원토건 사장) 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종사관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던 해월 황여일의 종택
평해황씨(平海黃氏)는

평해황씨는 우리나라 황씨의 종가로 한나라에서 건너온 황락(黃洛)의 후예이다. 그는 신라 유리왕 5년에 구대림(丘大林·평해구씨의 시조)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지금의 울진군 평해면으로 표류해왔다. 평해황씨는 황락의 세 아들 중 첫째인 ‘황갑고’(기성군)의 후예라고 전한다.

하지만 기성군 이후 계대가 분명치 않아, 후손인 황온인(黃溫仁)이 고려 때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내고 평해에서 세거하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황락을 시조로, 황온인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해황씨의 분파를 살펴보면, 황진의 후손이 검교공파(檢校公派), 황서의 후손이 충절공파(忠節公派), 황용의 후손이 충경공파(忠敬公派)가 되고, 검교공파는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불권헌공파(不倦憲公派)로, 충절공파는 예빈공파(禮賓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충경공파는 의정공파(議正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관찰사공파(觀察使公派, 監司公派)로 나뉘어진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모두 90명으로 그 중 문과가 22명, 무과가 19명, 사마시가 47명, 역과가 2명이다. 인구로 보면, 창원황씨가 25만2814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장수황씨 14만6575명이며, 세 번째가 평해황씨 13만7150명이다(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장수황씨 문경종택
평해황씨의 연혁과 인물

황온인의 8세손인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은 요동정벌 때, 태조 이성계를 따라 회군한 후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개국이등공신으로 평해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황상은 태종의 딸 신숙옹주의 부마가 되고, 병조판서를 지냈다.

황현(黃鉉)은 공조전서 황유정(黃有定)의 아들로서 태조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때 대사성, 인수부윤 등을 역임한 조선초기 유학자이다. 황여일(黃汝一)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선조 27년에는 형조정랑이 되고 다음해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황윤석(黃胤錫)은 영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익찬을 지냈다. 그가 쓴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와 ‘자모판(字母辦)’은 오늘날 국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성주목사를 지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중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황선신(黃善身, 병조참의 추증)등이 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평해황씨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였던 황만영씨가 있으며, 정관계에 황산덕(법무·문교부 장관), 황대봉, 황병우, 황병태, 황윤기(이상 국회의원), 황이수(전매청장) 등이 있으며, 황경로(황씨 중앙종친회장), 황진경(동국대학재단이사장), 휘경학원 이사장인 황온순씨가 있다. 또 황원구(연세대 교수), 황찬길(동양화가), 황지성(백암관광호텔 사장), 원로 영화배우이자 탤런트인 황정순, 마라톤 선수 황영조, 축구선수 황선홍도 평해황씨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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