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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 먼 환자 알권리…잘 설명한다는 것은

입력 : 2013-12-11 06:00:00 수정 : 2013-12-11 15: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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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스스로 수술·투약 결정케 하고 ‘위험성’도 알려줘야
딸이 의사로 있는 대학병원에서 2009년 뇌수술을 받은 남모(69·여)씨는 의료진의 과실로 뇌손상을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수술 과정에서 의료진이 환자 대신 응급의학과 교수인 남씨 딸에게 설명한 것이 문제가 됐다. 병원 측은 “딸의 의학적 지식이 충분해 수술 여부를 상의한 것이며, 본인에게 설명하면 불안감을 가중시켜 예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9월 “남씨가 의사 설명을 듣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병원은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얼마나, 어떻게 설명해야 충분한 것일까.

10일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 등에 따르면 판례는 의사의 ‘설명 의무’를 갈수록 엄하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법원의 해석 외에는 만족할 만한 의사 설명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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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를 통해 본 ‘잘 설명한다는 것’

판례에 따르면 의사가 해야 할 설명의 범위는 매우 넓다. 우선 환자의 질병 유무와 진단 결과를 설명해야 하고,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불확실한 진단도 알려줘야 한다. 방치할 경우의 상태, 치료 방법과 수단 등 질병의 경과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이때 성공 가능성, 실패할 경우의 대안, 수술이 도중에 확대될 가능성도 미리 말해줘야 한다. 법무법인 충정의 임치영 변호사는 “환자가 수술이나 투약에 응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치료 도중 나타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설명해줘야 한다. 2010년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한 여성(당시 28세)은 CT(컴퓨터단층촬영) 조영제를 투여받고 사망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서부지법은 지난해 “조영제로 쇼크가 발생할 확률은 0.02∼0.04%밖에 안되지만 희소한 부작용이라고 설명의 의무가 면제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설명의 방식도 엄격하다. 의사는 의료행위를 할 때마다 설명의 의무를 진다. 입증 책임도 의사에게 있다. 법무법인 세승의 조진석 변호사는 “의사가 진료기록 등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설명의무 위반이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 무능력자나 미성년자가 아닌 경우 환자만이 설명을 듣고 동의할 권리가 있다. 또한 설명은 환자가 의료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위험성과 비교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예컨대 심장수술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설명을 하면 안 된다.

의료현장에서 환자의 승낙은 대개 동의서나 서약서 형식으로 이뤄진다. 그렇더라도 자궁적출수술 도중 요관이 손상된 환자가 낸 소송에 대한 의정부지법의 최근 판결을 보면 인쇄된 수술동의서에 환자가 서명한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볼 수 없다. 법무법인 우성의 이인재 변호사는 “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환자가 실질적인 동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명 의무’라는 환자의 자기결정권 이론은 법원이 의사의 도움 없이 의료소송을 진행하고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침묵의 공모’를 함으로써 사실관계조차 확인되지 않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1979년 대법원에서 이를 적용한 판결이 처음 나온 이래 관련 소송이 증가하고 있다. 법률사무소 히포크라의 박호균 변호사는 “설명의무 위반은 모든 의료소송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명 의무 위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아직 무겁지 않다.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수백만원의 위자료만을 인정하는 수준이다. 다만 성형미용시술 등의 경우 위자료뿐 아니라 재산적 피해까지 배상하라는 전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나오고 있다.
잘못된 수술동의서의 예. 인쇄된 수술동의서에 환자가 서명만 한 것으로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할 수 없다.
◆판결 이외 영역에서의 ‘잘 설명한다는 것’

법원 판단을 제외하면 의사의 ‘설명 의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보건의료기본법과 의료법에 알권리와 함께 자기결정권, 요양방법 등을 지도받을 권리를 명시한 수준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가 의료기관에 게시토록 한 ‘환자권리장전’에도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이 한 가지 항목으로 포함된 정도다.

의료생활협동조합의 환자권리장전은 이보다 구체적이어서 ‘알권리란 병명, 병상, 병의 진전 예측, 진료계획, 치료와 수술, 약의 이름과 작용·부작용, 필요한 비용 등에 대해 납득될 때까지 설명을 받을 권리’라고 규정했다. 납득될 때까지 설명을 들은 뒤 의료 종사자가 제안하는 진료경과 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도 명시돼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의료 분야의 몇가지 표준약관을 만들어 이를 참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위원회가 만든 수술동의서에는 수술의 목적 및 효과, 수술 과정 및 방법, 부위 및 추정 소요시간, 발현가능한 합병증(후유증)의 내용, 정도 및 대처 방법, 수술 후 건강관리에 필요한 사항, 수술 방법 변경 및 수술 범위 추가 가능성 등에 대해 설명하도록 돼 있다.

‘설명 잘하는 세브란스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한 의사는 “설명 잘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까지 설명하지만 그로 인해 환자들이 더 불안해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잘’ 설명하는 게 무엇인지 다같이 고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윤지희 기자 phh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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