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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준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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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6-28 20:59:12 수정 : 2013-06-28 20: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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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 아픈 마음 끌어안지 못해
고민상담은 ‘신뢰’ 의미 감사할 일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어려운 사건에서 승소한 후 자축을 위한 칵테일 한 잔. 그리고 양념으로 가슴 떨리는 로맨스까지. 이런 일은 미국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고 내 일의 현실은 고민 상담의 연속이다. 변호사 업무 중 무엇이 가장 고되냐고 물으면 난 주저없이 ‘끊임없는 고민 상담’이라고 하곤 했다. 때로는 아침부터, 때로는 술 먹고 새벽에. 울기도 하고 짜증도 내고 화도 낸다. 그런 고민 상담을 한 번 하고 나면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들의 격한 감정이 내 정신에 그대로 이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변호사의 업무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는 장면은 미국 여류작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나온다. 주인공인 소녀의 아버지 핀치 변호사가 재판에서 지고 돌아와 힘들어할 때, 이웃 아주머니 모디가 여주인공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대신해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태어난 사람이 있다. 너희 아빠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야.” ‘이런, 세상에.’ 몇 해 전, 이 문구를 읽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 이 말이었어. 내가 내 직업에 대해 하고팠던 말이 그랬던 것이다. 내 직업은 남을 대신해 불유쾌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저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마냥 돈 잘 버는 편한 일이라 여긴다며 난 종종 자기 연민에 빠지곤 했다.

시간이 흘렀다. 만일 내가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지 않았더라면 난 여전히 나에 대한 오만한 연민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미야 잡화점’은 ‘나미야’(고민)라는 이름 때문에 장난을 많이 받게 되고 그 참에 잡화점 주인인 나미야 할아버지는 고민 상담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주로 초등학생을 상대로 상담을 했다. 하지만 나미야 할아버지는 그 누구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고민을 상담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할아버지는 상담편지를 받는 대로 끙끙거리며 그 고민에 자신의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 상담자의 행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상담자가 진정 고민하는 것은 무얼까, 이 상담자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고민상담자의 대부분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 내심의 결정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상담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일망정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조언이 자그마한 심적 안정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왜 사서 고생을 했을까. 그 아들도 한 번씩 핀잔을 주었다. 왜 돈도 안 되고 신경만 쓰이는 일에 열정을 쏟느냐고, 잡화점 운영도 내팽겨치고. 그러나 나미야 할아버지가 고민 상담에 감사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사실에 매료됐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서야 난 변호사 생활을 허투루 했다는 생각이 들며 멍해졌다. 그래, 고민을 상담한다는 것은 나를 신뢰하고 존중하고 싶어서였다. 징징거릴 상대가 없어서, 혹은 괴롭힐 상대가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내 말에 무게를 부여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난 그들의 신뢰에 감사하기보다는 힘들어했고 불편해했다. 말로는 생래적(生來的) 인문주의자라 주장하면서 의뢰인의 아픈 마음 하나 끌어안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은 믿음과 존중을 전제로 한 것. 이 간단한 사실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통해 비로소 알았으니 정말 기적은 기적이다.

임윤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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