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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늙음’에 대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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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4-19 20:30:18 수정 : 2013-04-19 20: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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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죄도 부끄러운 일도 아냐
욕망 버리면 노화도 아름다워져
“참, 이 작가님은 몇 년생이세요?” 한 고참 방송작가와 곱창집에서 김치찌개를 먹던 중이었다. 생각해보니 알고 지낸 지가 1년이 넘었는데도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그걸 왜 알려고 해요?” “아니 이 작가님만 제 나이를 안다는 건 불공평하잖아요.” “내 나이가 죄스러워서. 죄인된 기분이라 안 알려줄래요.” 이내 이 작가는 주변을 스윽 훑어보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평일 오후 8시쯤 곱창집에 있는 사람들이니 대부분 적당히 나이가 든 직장인이었다. “뭐 여기 보니 죄다 죄인들이네. 나 정도는 뭐 경범죄네. 변호사님도 경범죄인인걸요.” “뭐라고욧! 저 정도면 선고유예 받아요, 아니 기소도 안 돼요. 기소유예라고요.”

이렇게 나이를 묻다 말고 시작된 ‘죄인론’은 자연스레 영화 ‘은교’로 주제가 넘어가게 됐다. 나는 영화 ‘은교’가 소설 속 이적요 시인의 섬세한 죄의식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고 주장한 반면, 이 작가는 이적요의 죄의식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임윤선 변호사
사실 영화 ‘은교’의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내 느낌은 불쾌함 100%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주인공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포스터의 대표문구는 ‘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 서로를 탐하다’라니. 그건 마치 한 TV 광고를 보고 느꼈던 불쾌감과 유사했다. 50세는 됐을 듯한 중년 남성이 도서관 같은 곳에서 멋진 20대 여성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흐르던 멘트는 아마 ‘때로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여전히 가슴이 설레듯….”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광고를 보고 정말 화가 났다. 그것은 당시 내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유래된 불쾌함이었다. 시선을 받는 사람이 되레 당황할 정도로 당당하게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소짓는 기혼 남성의 시선들. 남성으로 느껴지기에는 지나치게 먼 연배의 분임에도 남성임을 어필하고자 목소리에 힘을 주더니, 돌연 차 한 잔 따로 먹자 은근히 건네던 그 불쾌한 제안들. 그 떳떳하기 그지없던 욕망들.

이런 다수의 경험은 영화 은교도 같은 족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사서 펼치면서도 난 이적요가 그냥 싫었다. 욕망을 변호할까 그게 싫었던 것이다. 이윽고 책을 다 읽었다. 내가 틀렸다. 이 소설은 욕망을 또는 설렘을 변호하지 않았다. 이적요는 끊임없이 자신의 설렘을 부끄러워했고, 작가는 그 부끄러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부끄러움마저도 비난할 작정이냐고. 그토록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하니, 오히려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적요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고 했다.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을 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늘 당당하던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혼자서는 테이크아웃 커피숍에 잘 들어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유인즉 괜히 늙은이가 들어가서 커피 맛 떨어뜨릴까 걱정돼서란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욕망이야 부끄러울 수 있지만, 늙음마저 부끄러워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렇듯 늙음 자체는 죄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덜 싱그러울 뿐이지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고흐는 ‘영혼의 편지’에서 노인의 주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누군가 장미꽃을 선물해 내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색이 차츰 바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한참 넋 놓고 바라본 적도 있다. 변색도 아름답더라. 그러니 늙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나아가 괜한 권위로 포장하면 좀 나을까 해서 목소리에 힘을 줄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늙음에 당당하되, 딱 그 선을 지켜줄 때, 노화도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임윤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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