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문화산책] 죄와 사람, 그리고 그 뒷모습

관련이슈 문화산책

입력 : 2013-03-15 21:31:28 수정 : 2013-03-15 21:31:28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단죄만 몰두하는 극단적 사회
연민 없는 법 자체가 죄일 수도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창 인기다. 이참에 프랑스에도 장씨가 있나 보다 하며 읽었던 ‘장발장’이 아니라 무려 2만여 쪽이 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완역본을 펼쳐보았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빵 한쪽을 훔쳐도 5년이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물론 장발장은 수시로 탈옥을 시도했기에 강제노역 기간이 19년으로 늘어났지만 이는 인권탄압 수준의 중벌이었으니 만일 현재 그 같은 법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위헌소송 감이다.

그런데도 자베르 경감에게 장발장은 그저 중죄인에 불과했다. 자베르는 장발장이 왜 빵을 훔쳐야 했는지, 형량이 적정한지, 그의 감금이 1789년 피로 얻어낸 자유라는 대원칙에 부합하는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행법의 집행에만 관심이 있었고, 이에 장발장을 ‘24061’이라는 수감번호가 찍힌 중죄인으로 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발장을 이름 대신 24061이라고 불렀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품의 바코드를 찍는 판매원처럼.

리더기로 상품의 바코드를 찍으면 모니터에는 그 상품의 이름과 가격이 정확하게 찍혀 나온다. 그리고 절대로 에누리가 불가능하다. 판매원에게 그 제품이 무엇이고, 어떠한 사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제품의 가격이 적정한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장발장에게 24061이라는 바코드가 찍힌 이상 그에게 장발장은 19년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죄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의뢰인 중에는 살인범으로 잡힌 사람, 횡령으로 잡힌 사람 , 그리고 배임수재로 잡힌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선 오직 죄만을 이야기한다. 죄만 안다면 평가도 편하다. 그러나 내 의뢰인은 변호인인 내게 죄와 더불어 그 죄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 삶을 안다고 해도 그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무표정한 표정으로 ‘삐빅. 그럼 당신의 죄는 15년짜리입니다’ 하며 바코드 리더기를 가져다 댈 수는 없다. 심지어 그들의 행위는 100년 전, 아니 500년 전이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임윤선 변호사
유럽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테스’를 언급하려다 북미 대륙과 태평양을 경유해 한반도로 왔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내가 법조인이 되는 데 약 7%의 역할을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고향 충주에서 발생한 ‘짐승’ 의붓아버지를 죽인 비운의 여인, 일명 ‘김진관·김보은 사건’이다. 사춘기 시절 그 기사를 읽으며 손이 바르르 떨렸다. 폭넓은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미국에서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그녀에게 설명했어야 했다. 그녀가 폭행교사범도, 횡령교사범도 아닌 살인교사범이라는 것을 말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남주인공 마이클은 오래전 첫사랑인 한나를 법정에서 마주친다. 한나는 지난날 한때는 죄가 아니었던 죄 때문에 피고인이 돼 묵묵히 처분을 기다렸고, 로스쿨생인 마이클은 그녀의 죄에 그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마냥 피고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변호사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다. 반대이다. 나는 해가 갈수록 쉬운 비판이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다. 죄도 벌도 무서워지고 있다. 가끔은 죄에 합당한 벌이란 무엇인지 의뢰인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 무섭기까지 하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는 법이란 그 자체가 죄일 수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더 리더’의 마이클처럼 피고인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할 때도 있다.

임윤선 변호사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