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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3.0] 한진 조중훈 창업회장의 起業家정신

입력 : 2012-11-16 21:06:42 수정 : 2012-11-16 21: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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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한 대로 시작해 하늘·땅·바닷길을 열어 한진그룹을 일군 故 정석(靜石) 조중훈 창업회장의 기업가정신을 함축한 단어는 바로 수송보국(輸送報國)이다.

뒷편 좌조부터 조중훈 창업회장, 조양호 회장, 앞줄 좌로부터 조현아ㆍ조원태 전무, 조현민 상무
조 회장의 아호 정석은 그의 선친 조명희 옹(翁)이 지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정석의 생각이나 호기심이 지나치게 크고 행동 또한 너무 동적이라서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속에 조화를 이룬 돌(石)의 사상을 잊지 말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줬다고 한다.

정석은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로 진학, 2년 만에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2등기관사 자격증을 받아 쥐고 일본 화물선을 탔다.

'사업은 종합예술'이라고 말해 온 정석은 1942년 일본에서 돌아와 목탄차 엔진을 수리하는 이연(理硏)공업사를 차렸다. 서울 종로구 효제동 한 모퉁이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규모는 작았지만 마모된 트럭엔진을 수리하는 알찬 사업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이연공업사를 포함해 모든 산업시설을 일제의 군수지원체제로 편입되고 정석이 징용영장까지 받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해방과 함께 정석은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아 트럭 한 대를 장만,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하고 운송업에 뛰어들어 오늘날의 한진그룹 주춧돌을 세웠다.

창업 2년 만에 화물자동차 10대를 보유하게 된 정석은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성장동력'을 확보했다. 창업 5년째 되던 해에는 종업원 40명, 트럭 30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운송전문회사로 성장했다.

◆ 陸海空 종합수송 완성한 'Mr. 신용'…트럭 한 대로 시작해 輸送報國 역사 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진상사의 차량과 장비는 군용을 징발됐고 직원들 역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또 한번 기회를 맞았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간 1953년 봄, 정석이 인천으로 돌아와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회사를 재건했다.

1957년 정석은 처음으로 미군과 7만달러짜리 수송계약을 맺었고 이후 연평균 300%씩 급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고 1960년에는 한해 계약고만 220만 달러, 용차를 포함한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규모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진이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사건은 '월남전'이었다. 월남전에서도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국내에서 미군 용역사업을 하면서 10년 동안 사귄 수송장교들이 정석의 월남 진출을 음양으로 도왔다. 정석은 퀴논에 파병중인 미군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1966년에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통역장교를 하다가 미 육군포병학교에 2년간 근무한 동생 중건 씨의 역할이 컸다.

그 후 1971년 종전으로 인해 수송용역을 마무리할 때까지 5년간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3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인 점과 1964년 7월 한국은행의 가용외화가 4700만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정석은 1960년 8월 15일 땅에서 키워 온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 보겠다고 마음먹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Air Taxi) 사업을 시작했지만 5.16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업이 여의치 않자 과감하게 정리했다. 아쉽게 항공사업의 꿈을 접은 조 회장은 1961년 8월 주한미국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진고속의 시초가 된다. 정석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청으로 항공사업에 다시 뛰어 들게 된다.

한편 정석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1960년대 말부터 사업을 확장했다. 1967년 7월에는 자본금 2억 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우고 그 해 9월에는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동양화재 인수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1977년 5월 정석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수산업에 치중하다가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한진해운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로 늘어나는 해운 수요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정석은 1987년 11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해 한진해운과 합병시켰다.

정석은 수송사업 외길을 개척해 육상운송 분야의 주식회사 한진, 해상운송 분야의 한진해운, 항공운송 분야의 대한항공 등 한진을 명실상부한 육·해·공 종합수송그룹으로 키워냈다. 정석은 육·해·공 운수업이 모두 정상궤도에 오르자 사업다각화에 눈을 돌렸다.

해운 규모가 커지면서 화물선 수요가 꾸준히 늘었고 보유 선박의 수리 물량도 적지 않아서 수지를 충분히 맞출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해서 인수한 후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키는 등 한진그룹을 10대 그룹 안에 포진시켰다. 정석은 말년에 사재 가운데 1000억 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쾌척했다. 2002년 11월 17일 인하대 부속병원에서 82세 일기로 타계했다.

◆ 99년 조양호 회장 취임 승계 완료…차세대 3남매 현장서 경영수업 활발

1992년 2월 27일 주총에서 장남 조양호 현 회장이 대한항공의 사장 자리에 선임되면서 2세 승계가 가시화됐다. 조 회장은 1974년 미주지역본부 과장으로 대한항공에 첫 발을 디딘 후 한진해운 미주지역 담당 전무, 1988년 대한항공 전무에서 수석전무로, 1989년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탄탄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1999년 4월 22일 정석이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장이던 조 회장을 그룹 회장에 낙점함으로써 모든 승계절차가 마무리됐다. 이때부터 조 회장은 소신을 갖고 그룹 경영에 전념하면서 한진그룹을 자산규모 38조원의 재계 8위(동일인 기준)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대한항공은 올 초 주총에서 한진그룹 3세인 조현아·원태 남매를 사내이사로 임명함으로써 3세 경영 승계의 서막을 알렸다. 막내인 조현민 상무 역시 진에어 전무를 겸직하면서 언니, 오빠 못지않게 활발한 대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유성호 기자 (경제매거진 에콘브레인 편집장ㆍ평론가 / shy1967@econbra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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